좀처럼 마음 둘 곳 없는 은희에게 ‘한 사람’이 찾아온다. 한문 학원에 새로 온 선생님 영지(김새벽)이다. 깡마르고 화장기 없이 지쳐 보이는 얼굴, 그녀는 아이들의 이름 다음에 좋아하는 게 뭔지를 묻는다. 교복을 입고, 미래를 위해 오늘을 포기해야 하는 학생들이 좀처럼 받기 어려운 질문이다. 영지는 은희가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주고, ‘만화 그리는 거’란 대답에 공감한다.
은희와 영지는 산책을 하면서 허름한 컨테이너 집을 지난다. 집을 안 뺏기려 현수막을 걸어 놓은 사람들, 그 핏빛의 절규(글씨)를 보며 은희는 “불쌍해요. 집도 추울 거 같은데”라고 말한다. 이에 영지는 “그래도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마. 함부로 동정할 수는 없어. 알 수 없잖아.”라고 답한다. 동정하려면 먼저 판단이 필요한데,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영지는 은희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본인이 어른이고, 좋은 대학을 다녔다고, 은희를 부족한 아이 취급하지 않았다. 학생이 인사하면 자기도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덥석 안지도 않았다. 은희가 속상한 일이 있어 울고 있을 때, 섣부른 충고로 가르치려 하지 않았고, 가만히 침묵으로 기다렸다. 은희는 아무 말 없이 곁에 있는 영지에게 가장 큰 위로를 받았고, 삶을 배웠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은희에게 영지가 찾아온다. 그녀는 가슴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말을 한다. “너 이제부터 맞지 마. 누구라도 널 때리면, 어떻게든 같이 맞서서 싸워. 절대로 가만히 있지 마 알았지?” 남을 함부로 동정할 수 없는 것처럼, 남이 함부로 나를 판단을 해서도 안 된다. 소리쳐서도, 때려서도 안 된다. 인간은 알 수 없을 정도로 깊다. 그게 존엄이고, 자유다.
영지를 보고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아름다움의 기준 말이다. 예쁜 얼굴, 볼륨감 있는 몸매, 화려한 옷, 이 시대가 말하는 아름다움이다. 남자도 마찬가지. 잘생기고, 키가 크며, 좋은 차를 타야 멋쟁이라 한다.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좋겠다. 따뜻한 말과 선한 손길, 인간에 대한 애정, 이것이 기준이 되면 좋겠다. 영지는 참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