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네 가족은 한 사람의 일생이다. 어린 시절,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수많은 감정싸움을 해야 하고(은희), 부모의 기대와 성공에 대한 압박에 눌려 개성을 잃고 살아야 하며(대훈), 조금만 엇나가도 비정상이란 소리를 감내하고 살아야 한다(수희). 또 생계를 위해 밤낮없이 일해야 하며(아버지), 꿈을 잃은 지 오래, 어디 마음 둘 곳 없이 가족 뒷바라지를 해야 한다(어머니).
‘수능 끝나면 나아지겠지, 취직하면 해결되겠지, 애들 다 키우면 좋아지겠지.’란 기대는 현실에서 실현되지 않는다. 오히려 나이를 먹을수록 해야 하는 임무는 점점 크고 무겁게 다가온다. 이 모든 고통이 죽어야 끝이 날 것 같은데, 죽음을 마주하기도 두렵다. 결국 오늘도 살아가야 하는데, 은희네 가족이 그런 것처럼, 우리의 삶도 위태롭다. 한숨이 익숙해진 지 오래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사는 게 즐겁고, 오늘이 행복한 사람이 있다. 하지만 전쟁터에서 상처입지 않는 사람은 없는 법. 오늘 총을 맞지 않았다고 해서, 내일도 총알이 피해 가란 법은 없다. 전쟁이 길어지면 더욱 그렇다. 운이 좋아 한두 번, 아니 열 번은 피할 수 있으나, 다 피할 수 있을 정도로 인생은 짧지 않다. 아직 오지 않았을 뿐, 나에게 어딘가 오고 있다.
우리는, 독감주사를 맞듯, 고통 예방주사를 맞아야 한다. 그 주사는 지금 눈물 흘리고 있는 사람들의 손이다. 그 슬픔의 저릿함이 나에게 닿을 때, 인생을 배우고, 아픔을 견디는 힘을 얻는다. 그래야만 큰 충격이 나에게 오더라도, 그 상처에 매몰되지 않고, 고통을 이겨낼 수 있다. 누군가 손 내밀어 주기를, 그 온기로 얼어붙은 내 마음이 녹아내리기를 기도하면서 말이다.
한없이 무기력하게 느껴질 때, 영지는 은희에게, 자기 손가락을 움직여 보라고 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손가락 움직일 힘은 남았다. 그 손으로 무슨 일을 할까. 아파하는 누군가의 손을 살며시 잡는 것. 은희의 손을 잡은 영지, 아마도 그전에 누군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았을 것이다. 이제 남은 건 은희, 영지를 기억하며 누군가의 ‘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