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갑(甲)살이

너에겐 을살이

by 안효원

어제 이 동네에 눈다운 눈이 처음 내렸다. 아이들은 학교 가고, 아내는 수업 갔다. ‘점심을 뭘로 때우나.’ 하다가, 여행 기분을 내고 싶었다. 피자를 데우고, 맥주 두 캔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추위보다 미안함이 더 크게 다가왔다. 친구들은 이 시간 일하고 있는데, 혹한기 훈련을 하는 군인들이 저기서 떨고 있는데…. 하지만 먹자, 날짜 지난 냉동피자에 맥주 한 잔 못할까.


‘알릴레오 북스 - 신영복 편’을 보다가 문득 ‘갑(甲)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이 들어가면 ‘갑질’이 떠오르고, 갑질은 나쁜 말이니까 그래서 찾아낸 말이 ‘갑살이’. 무슨 개새끼 종자와 비슷한 말이지만, 이렇게 살지도 못했다. 나는 늘 을(乙)이었다. 신의 뜻, 부모의 뜻, 선생의 뜻, 주변 사람들의 뜻, 늘 타자의 시선에 나를 굴복시켰다. 늘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살다 간 제대로 못 살지.’ 싶은 마음이 들었다. 도올 김용옥 선생님의 동학 강의를 들으며, ‘나’란 존재가 ‘나’의 전부란 것을 배웠다. 누구의 말도, 나의 동의가 없는 한, 나의 몸을 구속할 수 없다. 그게 신이라 해도 마찬가지. 내가 선택하고, 내가 살고, 내가 책임진다. 을의 자리에서 책임을 회피하고, 억울해하지 않겠다. 무엇보다 ‘너’의 삶에 갑질하지 않겠다.


요즘 아들이 ‘리무진’이라는 랩 음악을 흥얼거린다. ‘까만 리무진 보며 꿈을 키웠지 언젠가는 나도 저걸 갖게 될 거야.’ 대충 뭐 이런 내용. 아들에게 말했다. “리무진 타려면 돈 많이 벌어야 해. 돈 많이 벌려면 일 많이 해야 해. 일 많이 하면 너로 살 시간 없어.” 뭐,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이야기, 남들은 이미 그렇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뒤늦게 깨달아 더 귀한 이야기.


어제는 눈이 참 예쁘게도 왔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최선덕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