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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효원 Sep 24. 2023

18대 1의 전설

[깜언 베트남 6] 나이 마흔, 남자 셋, 여행(시즌 3)

“핸디캡은 바위도 뚫고 나온다더니, 젠장.”


세 홀 연속 보기 플레이를 선보인 김사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다음 파 4 두 홀에서 양파 두 개를 깠기 때문이다. “골프라는 게 참 무서워. 초반에 잘 맞아도 어느 순간 안 맞아서 결국은 자기 실력대로 스코어가 나오더라고. 저 웅장한 바위를 봐. 저것도 뚫고 나온다니까.(웃음)” ‘음, 그렇다면 양파로 시작해 꾸준히 점수를 쌓기만 하는 나는 줄일 때가 온다는 것인가?!’


그렇게 억지 희망이라도 생기면 좋으련만, 이놈의 마음에는 얼마나 단단한 바위가 있기에, 현실세계로 나올 생각을 안 한다. 실력은 안 늘었어도 정신력은 강해졌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겨우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데…. 두둥! 뒷 팀이 우리를 따라붙었다. 얼마나 대단한 놈들이기에, 5홀 만에 우리를 따라오는가?! 아니, 우리가 아니지. 더딘 속도의 책임은 오직 나!!


다음 팀이 보는 가운데 파 5 18번 홀을 시작했다. 아, 18, 홀. 그린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내 미래도 보이지 않았다. 홀로 욕먹는 건 괜찮아도, 민폐 끼치는 건 죽어도 싫다. 4대 4 미팅을 나가도 나를 콕 집어 “쟤. 폭탄이다, 야.”란 소리를 듣는 게 낫지, 내 친구들이 “여기 완전 지뢰밭이네!”란 말을 듣는 건 더 싫다. 방법이 없지는 않지. 전력질주 후에 빠르게 치면 되니까.


안 되었다. 빠르게 치면 칠수록 공은 산으로 날아가고, 세게 치면 칠수록 가까운 곳에 떨어졌다. ‘이러다 다 죽겠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속으로 ‘천천히, 천천히!’ 주문을 외웠지만, 어느 순간 ‘천천히’도 ‘빠르게’ 하고 있다. 이럴 땐 차라리 눈앞이 깜깜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면 좋으련만, 사람들은 왜 이리도 잘 보이는지. 심지어 저 멀리 진행요원이 오는 것도 보인다. 


520미터 필드 중심에서 나를 둘러싼 이들은…. 김사장, 김차장, T선배, 그리고 우리 캐디 4명, 다음 팀 4명, 캐디 4명, 거기에 진행요원까지 모두 18명. 우리 팀에 부담되기 싫고, 뒷 팀에 민폐 끼치기 싫어 지루한 속도전을 펼치다 보니 ‘나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골프를 ‘18대 1의 싸움’으로 변질시켰다. ‘18대 1의 전설’을 라구나 랑코 18번 홀에서 기어이 해내고 말았구나.


18번 홀에서 18, 양파를 까고, 1번 홀로 넘어갔다. 아까 보았던 장밋빛 1번 홀은 어느덧 잿빛으로 변했다. 열심히 치고는 있는데, 마음에 커다란 홀(Hole)이 생긴 것 같다. 막판에는 그린 위치를 착각해 엉뚱한 곳으로 쳤다. 밝은 미래를 수없이 상상한 곳이었는데. 홀연히 김차장이 한 말이 떠올랐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처맞기 전에는. _ 마이크 타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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