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의 끝에서 서로 만나게 된 월트와 타오 가족. 겉으로는 강하고, 무심한 듯 보이지만, 그들은 모두 전쟁으로 인한 상처를 안고 오늘을 힘겹게 살아간다. 월트는 어리고 순수한 17세에 한국전쟁에 참가했는데, 그곳에서 처절한 현실보다 더 용서할(받을) 수 없는 자기 내면의 민낯을 본다. 일에 매진하고, 가족에 헌신하고, 강한 척하는 것은 전쟁의 기억을 잊기 위함이다.
다 잊고 싶지만, 지울수록 더 선명해지는 악몽은 무얼까. 살인? 월트의 깊은 곳에는 더 끔찍한 게 있다. 광기의 현장에서 자신도 모르게 불쑥 나타난 살인에 대한 욕망과 희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그래서 결코 용서받지 못했던 일이다. 하지만 그는 타오 가족(아시아인)을 갱단을 상대로 지키고, 부끄러운 잘못을 고백하면서, 자신의 감추고 싶은 모습과 마주할 용기가 생긴다.
타오 가족은 어떤가. 그들은 베트남 전쟁의 후폭풍으로 보트피플이 될 수밖에 없었던 ‘몽족’이다. 살기 위해 부유하는 삶, 그저 ‘거기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남보다 힘들게 살아야 하는 비극적 운명. 하지만 감독은 그들을 고된 삶에 처박아 두지 않고, 한 인간을 다시 살게 하는 구원의 손길이 되게 했다. 살아 숨 쉬는 몸으로, 뜨거운 마음으로 한 사람을 바꾼 생명의 기운!
삶에 대한 통찰이 깊어 종교적이기까지 한 <그랜 토리노>가 가장 빛나는 지점은, ‘유머’다. 인물들이 느끼는 문화적 이질감은 경쾌하게 그려지고, 월트와 손주뻘인 타오와 수가 티격태격하는 모습에 빙그레 웃지 않을 수 없다. 월트가 잔뜩 찡그려 “겨울 되면 추워서 갈 줄 알았는데, 아시아 놈들이 아직도 살아” 말하면, 수는 “예전에 추운데 살았어요” 쿨하게 대꾸한다.
웃을 일 없는 이들의 웃기는 이야기. 월트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나도 웃을 일 있어야 웃는 줄 알았지. 어른이 되고 나이가 들면서 웃을 일이 점점 없어지네. 어느덧 고약한 인상파 늙은이가 돼 버렸어. 그래서 웃으려고. 잘 살아서 웃는 게 아니라, 잘 살려고 웃는 거야. 웃을 일이 없어서 웃는 거라고. 그러다 보면 좀 나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 웃어, 아끼면 돌 된다!’
타오 가족을 만나면서 웃음을 찾은 월트는 귀찮기만 한 어린 신부 놈에게도 마음을 열고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됐다. 어쩌면 그 순간 천국의 문이 열리는 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