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생각해보면 이상하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당신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상하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국내 비만 인구가 여성 기준 약 25%, 남성 기준 약 40%, 다이어트 프로 등을 보면 100kg가 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실제로 길거리에서, 당신이 가는 모임 내에서 보이는 사람들은 죄다 날씬한 것만 같다.
퀴어퍼레이드 날이면 참가 규모 12만명이라는 기사와, 인구의 약 10% 가량이 퀴어라는 기사도 있는데 정작 당신 주변엔 한 명도 없는 것 같다.
1000만명 인구가 사는 서울에만 장애인이 40만명 등록되어 있다는데, 사람이 많은 곳 어디를 가도 100명 중 4명 꼴로 장애인은 보이지 않는 것 같는 것 같다.
사회적 약자들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보이지 않는다. 비만인, 퀴어인, 장애가 있는, 질병이 있는, 채식을 하는, 소수종교를 가진, 다양한 약자 정체성은 항상 숨겨야 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드러내더라도 사회적 정상 범주에 있는 척을 하도록, 무해해야 함을 강요 받기에 사회적 약자들은 우리 주변에 잘 ‘없다’. 이렇게 말하면 “우리가 언제 그렇게 하라고 강요했어? 인간은 모두 평등한 건 당연한 사실 아닌가?” 라며 억울해 하는 당신이 있을지도 모른다.
A – 저 어제 주말에 남자친구랑 산에 다녀왔어요.
C – 날씨 좋아서 데이트하기 너무 좋죠~ 재미있었겠다. 저도 연애하고 싶어요.
A – 제가 남자 소개 시켜드릴까요?
C – 좋은 남자 있어요? 저야 감사하죠~
A – 그런데 B씨는 남자친구 없다 했죠? 남자친구 안 만들어요?
B - (필요한게 남자친구인지 여자친구인지도 안 물어보시고 다짜고짜 남자친구라고 생각하시네요)
D – B씨는 만나는 사람 있다면서 결혼은 안해?
B – (네? 우리가 니네처럼 결혼을 할 수 있는 커플인지부터 물어보셔야 하는 것 아니에요?)
D – 남자친구 언제 구경시켜줄거야~
B – (보여 드리면 감당은 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E – 솔직히 비만과의 전쟁 이런 프로 보면 저렇게 뚱뚱한 사람들은 다 어디서 나오는 건지 신기하지 않아?
F – 그러게. 100kg 넘는 사람들이 저렇게 많은가? 길에서도 보기 힘들지 않나…..
E – 아, 전에 길에서 한 번 봤는데. 무슨 푸드트럭에서 핫도그 먹다가 ㅋㅋㅋ
F – 솔직히 살 찌는 건 다 이유가 있다니까. 남들 움직이는 만큼만 움직이고 먹는 만큼만 먹어도 살 그렇게 안 쪄.
아, 너처럼 통통한 정도 말고. 진짜 뚱뚱한 그런 케이스 말하는거야. 알지?
G – 주변에 레즈나 게이 본적 있어요?
H – 없어요. 그런데 난 상관 안 해요. 다 개인의 취향이지 뭐.
G – 아 진짜? 저는 좀 그렇던데 ㅋㅋ
H – 뭐 어때요 다 자기 개성에 사는 세상인데. 나만 안 좋아하면 난 상관 안해요.
B – (이성애자한테도 저렇게 말하나..)
구성원 아무도 위 대화들과 같은 상황을 폭력적이라 느끼지 않는 환경에서 나 혼자만 느껴지는 위화감과 불편함은 끊임없이 자신을 스스로 ‘예민하고 이상한’ 사람으로 여기게 만든다. 사회적 약자들이 흔히 말하는 ‘인싸 모임’에서 그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은, 그들이 태생부터 모두 음침하고 집단과 못 어울리는 아웃사이더들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대화와 전제의 기본값에서 배제되는 존재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곳에서 본인을 드러내는 것은 항상 너무도 힘겹다.
알게 모르게 계속해서 없음을 전제당하고, 정상성을 요구받고, 배제가 기본값인 사회. 당사자가 그곳에 있기에는 너무 불편한 공기. ‘일반적’이고 ‘평범한’ 모임에서 자꾸 뭉쳐지는 그런 공기들이 점점 더 그들을 음지로 밀어낸다. 이것이 무서운 이유는 ‘나는 이런 곳에서 환영받지 않아, 없는 취급 받아, 쓸모 없어.’ 등 구체적으로 언어화가 되어 생각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냥 점점 더 그 모임과 사람들이 재미 없어지는 것이고, 해당 모임에서 이유 모를 무력함과 외로움이 찾아오고, 그 모임에 가기 싫어지는 형태로 드러난다. 즉 약자들 본인도 이유를 구체화시키지 못한 채 그냥, 점점 더 밀려나는 것이다.
예전에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꿋꿋하게, 나만 씩씩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이런 ‘평범한’ 일반 모임에 열심히 속하고 다녔고, 한명이라도 인식을 바꾸려 노력하고 다녔던 적이 있다. 누군가 무례하게 헤테로 패싱을 하면 굳이 꼭 집어서 “그런데 왜 ‘남자친구’라고 가정하고 말하세요? 누군가는 아닐 수도 있어요.” 라고 지적을 했고 불편함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면 대부분은 “아, 죄송해요. 생각 못했어요. 그렇네요 앞으로는 그래야겠네요.” 하는 반응을 보였으니까. 당사자성이 없는 부분들에서도 자주 발끈했다. 그런 말 하시면 안 돼요, 조금 전 그 발언은 어떠어떠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혐오성 발언일 수 있어요 등등.
그러나 그럴수록 지속적으로 소진이 되는 기분이었으며 마모되는 기분을 느꼈다. 평범한 ‘일반적’인 생각이라는 것, 커다란 사회의 인식이라는 것은 모두 내겐 너무 커다란 것들이었다. 게다가 이 사회의 사람들은 인권이라는 부분을 생각보다 굉장히 우습게 보며 본인이 판단하려 드는 경향이 있다. 내가 보기엔 아닌데? 이런 적도 있는데? 나는 그거 때문에 피해 봤는데? 사회적으로 문제인건 사실이잖아, 그냥 생각이 다른거니까 날 고치려 들지 말아줘. 심지어는 대놓고 싸우자는 사람도 많고, 자신은 잘 모르는 부분이니까 구체적으로 자신에게 설명해달라 해놓고 친절하게 설명을 하면 들을 생각도 없이 자신의 생각만으로 반박만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건 지속적인 충전이 절대 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고 나는 그냥 조용히 입을 다물게 되었다. 그렇다고 속으로도 아무렇지 않은 건 절대 아닌 그 상태 그대로.
그러다가 어느날 우연히 찾게 된 페미니즘 독서 모임. 난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모이는 집단에서는 그런 느낌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페미니스트 모임, 성소수자 모임, 장애인/질병인들 자조모임, 채식인들 모임 등 이 세상에서 마음 편하게 살아가지는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커뮤니티가 많았고, 그곳에서 당사자들은 알 수없는 폭력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며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농담, 누구도 혐오하지 않는 대화들, 한 개인의 특성만으로 편견과 선입견을 갖지 않는 사람들, 그 동안 세상에서 받아왔던 폭력들에 대한 공감의 대화들. 무엇보다 좋은 것은, 불편할 때 불편하다고 말할 수 있는 분위기. 그 누구도 ‘예민하다’를 욕으로 쓰지 않으며 오히려 감수성 깊고 기민한 사람에게 붙여준다. 묘한 위화감과 불편함 없이 깔깔 웃을 수 있는 공간에서 나는 유일하게 내 자신을 오롯이 인정하고 바라볼 수 있었다.
백인, 남성, 비장애인, 중산층 계급, 비질병인, 유성애자, 시스젠더, 헤테로 …. 사회 내에서 ‘정상성’을 가진 사람들이란 늘 어떤 모임에서도 이런 기분을 느끼고 살아갈까 하는 상상을 자주 한다. 오늘도 그냥 말 한마디 덧붙이기보다 괜히 한걸음 뒤로 가게 되지만, 언젠가는 내가 숨쉬는 모든 공간 속에서 모든 자들이 불편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회가 꼭 오기를 바란다.
아, 그리고 당신 곁에는 ‘그런’ 사람들이 없는 게 아니라, 당신이 숨 쉬듯 내뱉는 폭력성에 숨 죽이고 있을 뿐이다. 아니면 이미 진작에 당신 곁을 떠났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