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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주댁민댕씨 Sep 16. 2021

나의 할머니

나의 할머니


내가 한 서너 살 되었을 즈음 잠시 할머니 집으로 보내졌었다. 내 기억도 가물가물 하지만 아마 동생이 태어나기 전이 었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그때의 할머니는 참 곱고 젊었다.

아침에면 반질반질하게 닦아낸 세수 끝에 로션을 바르고 단정하게 빗어 내린 머리에 기름을 발랐다.

여름이면 풀 먹여 반듯하게 다려놓은 모시 저고리가 그리 예쁠 수가 없었다.


할머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작은 시골마을을 참 잘도 누비고 다녔었다.

가끔 하루에 겨우 네다섯 번 다니는 버스를 기다리고 그 버스에 올라 고모네 집까지 갔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 집과 고모네 집에 그리 멀지는 않았지만 중간에 버스터미널에 내려 다시 갈아타고 가야 고모네 집까지 갈 수 있었다. 중간에 버스가 내리면 그 주변 시장을 돌고 돌아 할머니는 예쁜 머리방울을 사주시거나 맛있는 간식을 손에 쥐어주곤 하셨다.


그렇지만 누구나 할머니 하면 떠오르는 그리 자상한 사람은 아니었다.

싸우거나 화난 사람처럼 말을 하기도 하고 담배도 태우고 욕도 무섭게 하신다.


지금 생각해보면 할아버지도 없이 일찍 혼자가 되어 아이 셋을 키우며 우리 할머니는 흔히 말하는 보통 아닌 성격의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서울로 돌아와 동생 둘이 생기고 부천으로 이사하면서 아빠는 할머니를 우리 집으로 모시고 오셨다.

말이 모시고 온 거지, 엄마와 아빠의 일 때문에 우리와 함께 지내며 육아를 도맡아 하시게 된 것이다.

할머니의 집은 이제 사라졌다. 우리 집에서 함께 지내기로 하면서 그 집은 어떻게 됐을까?

어렸으니까 그때는 물어볼 생각 조차 전혀 하지 못 했었다.


할머니는 장에 가서 사 온 엿을 뜨끈뜨끈한 방바닥 안으로 무거운 목화솜이불을 덮어 조청을 만들었다. 나는 이불속에 몰래 들어가 조청을 퍼먹었던 기억이 난다. 나뭇 살에 하얀 종이를 발라놓은 뒷문을 열면 옥수수들이 줄을 서 휘청거리고 있었고 방 앞문을 열면 마루가 항상 반질 반질 윤이 나 있었다.

그 앞마당에는 강아지들이 있고 마루 끝에 있는 부엌 턱을 할머니는 하루 종일 오가며 바삐 지냈던 기억의 그 집은 아마 흔적도 없이 지금은 누군가의 집터가 되어있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혼자 지내던 할머니는 우리와 함께 지내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할머니와 참 많이도 다퉜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와는 말이 안 통한다고 생각하고 답답했던 내 어린날의 초라함이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부끄럽다. 머리 좀 컸다고 할머니 말도 잘 안 들었겠지!


나 보다도 아빠와 참 많이 다퉜다. 자식이니까 부모에게 의지하고 싶었겠지, 엄마야 시어머니에게 대들 수 없는 노릇이고 할머니는 아이 셋을 챙기느라 얼마나 또 그 고충이 심했을까, 그걸 알아주길 조금은 바라는 마음에 늘 그리 투닥 드렸는지도 모르겠다.


가끔 짐을 싸서 고모집으로 휙 떠나버렸지만 결국은 우리에게 돌아왔던 할머니였다.

예전에는 그런 할머니도 아빠도 모두 이해가 되질 않았지만 내가 결혼을 하고 자식을 키우고 시댁과 친정을 오가며 모든 것이 아주 조금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할머니는 곁에서 나와 내 동생을 참 많이도 챙겼다. 새벽이면 일 나가는 엄마 아빠는 할머니가 있었기에 아이들을 뒤로하고도 안심하고 집을 나섰을 것이다.


가끔 할머니가 싸주신 도시락을 놓고 학교에 갈 때면 그 도시락을 챙겨 학교까지 가져다주는 할머니가 그때는 왜 그리 창피했는지 모르겠다. 동생까지 챙겨 손녀딸 굶을까 걱정하며 달려왔을 텐데  말이다. 그런 마음도 모르고 늘 엄마를 그리워했다.

친구 집에 놀러 갔다 오는 날이면 그 그리움은 말 못 할 정도로 커지고 만다.

새벽이면 일을 가는 엄마는 늘 집에 오면 자고 있었기 때문에 친구들을 데리고 오는 일도 나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 그리움을 늘 조금이나마 채워주고 계셨던 건 나의 할머니라는 사실을 참 늦게야 알았다.


결혼을 하고도 가끔 할머니와 통화를 했다. 아주 가끔!

대부분 내가 하는 것보다 할머니가 나에게 걸어 준 전화가 훨씬 많을 것이다.

애 키운다는 핑계로 연락도 잘하지 않았었다.


지금 할머니는 요양병원에 계신다.

이미 나와 동생들은 부모님과 떨어져 살고 있고 여섯이 북적대던 집에는 세 식구뿐인데 엄마 아빠도 일을 나가시다 보니 할머니는 늘 혼자였을 것이다.

어느 날 일 끝나고 돌아온 엄마는 방에 쓰러져 있던 할머니를 발견하고 무척 놀랐다고 하셨다. 그 일이 있고 아직은 일을 하고 계시는 부모님은 할머니를 요양병원에서 생활할 수 있게 도왔다.

@ssuzzzy_ , 출처 instagram


그 소식에 달려가 작년에 만난 할머니는 무척 야위었지만, 아빠는 쓰러지셨을 당시보다 상태가 무척 좋아졌다고 하셨다.

"죽어야지! 늙으면 죽어야지."라고 20년을 말씀하시면서도 늘 정정한 모습에 남의 일처럼 생각하고 지나쳤는데 어느새 초라해진 모습을 보니 뭔가 안쓰럽고 지나간 세월이 무섭기도 했다.


할머니가 병원에 계시고는 갑자기 생각이 나서 문득 전화를 걸고는 했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문득 할머니의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곤 한다.

딱히 할 말이 없었지만, 그냥 전화를 걸고 또 안부를 물었다.

할머니는 힘없는 목소리로 나와 나의 아이들을 걱정한다.


생일을 맞아 할머니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를 않으신다.

코로나 때문에 병원에서 면회도 되지 않으니 요즘 할머니는 어떤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병원에 찾아가는 부모님도 할머니 얼굴을 뵙지도 못하고 병원 로비에 전달을 부탁하면 그 물건들만 챙겨 할머니에게 가져다준다고 하니 할머니의 컨디션을 확인할 방법은 전화로 목소리를 듣는 게 전부다.


다음날이 되어서야 할머니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전화를 걸었었다고 했더니 "이제는 귀도 잘 안 들려..."라는 대답뿐이었다.

그리고는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나를 걱정하고 나의 아이들을 걱정하신다.

마지막으로 보고 돌아가셨던 쌍둥이들도 많이 컸겠다며 말을 흐린다.

엄마가 음식을 잔뜩 차려와 병원에 있는 할머니들과 나눠 드셨다며 신이 나서는 자랑을 하셨다.


이제 내 나이도 40이니 우리 할머니 많이 늙기도 늙었다.

철없던 그때의 당돌함도 지나간 시간 속에서 흐릿해져 간다.

과연 나의 할머니는 얼마나 남은 생일을 품고 계실까 싶은 생각에 또 과거를 추억해 본다.


엄마에게 모질 던 할머니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잘 챙겨주는 엄마,

툭툭 거리면서도 늘 할머니에게 달려가는 아빠도, 같이 늙어 가면서 서로를 위로한다.


지금까지 곁에 있는 나의 할머니에게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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