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만에 동생과 서울 나들이에 나섰다.
목적은 첫째의 '이모와 호텔에서 하룻밤 자기' 그리고 둘째의 '서울 남산 케이블카 타기와 경복궁 가기' 두 가지를 목적으로 시작된 여행이었다.
둘만 보낼 수 없어 막내 둥이들은 아빠에게 맡기고 떠난 여행이었다.
캐리어를 싸면서 책을 하나 들고 가고 싶었지만 아이들도 있다 보니 책 읽을 시간도 없을 듯했고 그냥 뭐라도 하나 챙겨 들고 가자 해 넣은 것이 컨셉진이었다.
다행히도 내게 그 작은 책 정도는 읽을 시간이 주어졌다.
중간중간 사진을 넘겨 보다 그대로 화장대 구석에 꽂혀 있던 컨셉진을 꺼내 들고 와 조용하고 습한 욕실에서 몇 년 만에 즐기는 반신욕과 함께 한 장씩 한 장씩 넘겨 보는 재미가 있었다.
사실 첫 장에서 에디터 김경희 님이 남긴 글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합정역 7번 출구로 나와 골목으로 5분... 을 시작으로 누군가의 상상을 훔쳐보는 듯한 재미를 느꼈다. 상상을 더하고 더하여 5년 후의 현실도 너무 아름다웠다. 생각해 보면 문득문득 스쳐간 생각들은 있었겠지만 특정적인 일을 두고 길게 상상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추억은 나의 고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하루는 국어 선생님께서 수업은 안 하시고 본인이 상상하는 미래에 대한 글을 써보라고 하셨다. 그게 무척이나 재미있어 성인이 되어서도 가끔 그때의 상상을 끄집어내곤 했었다. 전혀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하니 더욱 재미있었는지도 모르겠다.
' 우연히 알게 된 한 남자아이는 연예인 지망을 꿈꾸고 있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우연히 몇 해를 스쳐 간다. 그리고 몇 년 뒤 나는 꿈꾸던 라디오 작가가 되어있었다. 막내 작가로 일하던 어느 날 우연히 프로그램에서 신인 그룹을 소개한다. 그 속에서 그 아이를 다시 만난다. 그리고 우리의 이연은 시작된다. ' 지금 생각해도 무척 엉뚱한 상상이었다. 지금은 단 몇 줄로 이야기를 정리했지만 그때만 해도 A4 용지를 꽉 채웠던 기억이 난다. 순간순간의 사건들도 내 나름 스토리를 만들었던 것 같다. 그 당시 왜 였을까? 나는 라디오 작가를 꿈꾸고 있었다.
라디오 듣는 것을 참 좋아했다. 나지막이 저녁시간에 흘러나오는 음악과 목소리가 뒤엉켜 나의 감성을 자극하는 것 같아 좋았다. 도서실에 앉아서도 공부하는 시간보다 라디오를 듣고 편지를 쓰는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엉뚱한 것 같지만 역시나 공부에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물론 그때는 글 쓰는 것도 좋아했다. 가끔 라디오에 긴 편지를 보내곤 했다. 라디오에서 나의 사연이 흘러나오는 짜릿함도 느껴 보았고 사연을 보낸 덕에 선물도 몇 번 받아 보았다. 같은 반 친구는 어느 날 나에게 물었다. "너 라디오에 사연 보냈었어?" 라디오에 내 사연이 흘러나와도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함께 듣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 꽤나 당황했던 것 같다.
"라디오 작가가 되고 싶다고 한 것 같아서... 어제 부천 뭐라고 하면서 네 이름이 나오는 것 같아 한번 물어 본거야!" 나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내가 보낸 사연이었어."
"그랬구나, 잘 썼더라! 잘 들었어..." 그냥 그 한마디가 참 좋았었다.
그래서 였을까, 작사가를 꿈꾸는 친구와 함께 글쓰기를 놀이처럼 즐겁게 했었던 것 같다.
그저 상상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만들 수 없는 이야기나 망상 같은 거라고!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좀 더 관심 갖고 공부했더라면 과연 현실은 달라졌을까? 누군가의 도움과 내 노력이 빛을 바라고 현실이 되어있었을까? 내가 대학에 갔었더라면 또 많은 것이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하는 생각들이 뒤덮여 꼬리의 꼬리를 문다.
무슨 일이 닥치면 나는 늘 생각한다. '어떻게든 되겠지!'
생각해보면 무척 긍정적인 사고 같지만 또 그만큼 큰 의미나 고집 없이 살고 있다는 것 같아 가끔은 울적해진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을 후회하거나 부정해 본 적은 없었다.
어떻게든 되어가는 내 삶에 주인공 이랍시고 지금 본캐의 주부가 되어 네 아이의 엄마가 되어버렸다.
얼마 전 글쓰기 모임 사람들과 쉼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원하는 쉼을 서로 구체적으로 표현해 보자고 한 적이 있었는데, 내가 원하는 쉼에 대해 어렴풋이 그려 보는 게 다였다.
생각보다 구체적으로 상황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그 일이 지나고도 가끔 상상에 상상을 더해 그림도 자꾸 그리다 보니 또 언제 가는 정말 내 것이 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도 조금 더 보태 보았다.
'작은 캐리어와 배낭을 메고 파리 공항에 내린다. 지하철을 타고 숙소를 찾아간다. 가방과 신발을 모두 바닥에 팽개치고 조용히 침대에 눕는다. 눈을 끔뻑거려 본다. 조용히 휴대전화를 들고 방에서 나선다. 저녁을 먹기 위해 골목을 돌아본다. 우연히 찾은 작은 식당에 앉아 가게 안에 울려 퍼지는 음악에 귀를 기울인다. 따뜻한 음식과 와인 한잔으로 기분을 더 한다.
다음날 아침 주변을 산책한다. 지도 앱을 주시하며 골목을 누빈다. 동네 빵집에 손수건을 들고 줄을 서 본다. 손수건에 싸들고 온 빵을 숙소로 가져와 무화과 잼을 쓱쓱 발라 먹어본다. 수도꼭지를 돌려 고블렛 잔에 물을 한 컵 받아 벌컥벌컥 마셔본다. 창밖에는 에펠탑이 보인다. 몽마르뜨 언덕으로 찾아가 신혼여행 중에 에스프레소를 마셨던 카페를 찾아간다. 커피 한잔의 여유를 느끼며 책을 넘겨 본다. 걷고 또 걸으며 길을 누비고 돌아오는 길에 튤립을 한 다발 사들고 온다. 늦은 오후 낮잠에 빠져 본다. 자고 일어나 조용히 맥주를 사러 나가본다. 맥주를 사서 들어와 다시 뒹굴거린다.'
내가 다시 상상해 본 순간은 이 정도였다. 상상하는 동안 신혼여행의 추억이 떠오른다.
컨셉진 뒷면에 이런 글이 쓰여 있다. '당신의 일상이 조금 더 아름다워집니다.'
사실 그 상상을 채우기 전까지는 무수한 계획도 무수한 노력도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상상 만으로도 너무 즐거운 마음이 솟아난다. 그 덕에 일상이 왜 더 아름다워지는 지도 알 것 같다. 그 상상을 현실로 만든다면 아마 그 아름다움은 더욱 빛이 날 것이다.
앞으로는 내 상상에 조금 더 마음을 기울여 보고 싶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