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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주댁민댕씨 Aug 20. 2021

초보운전

나는 운전을 시작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 이제 1년 조금 넘었을까...

처음 운전에 도전해 볼까 하면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나도 해!" "나도 하는데 뭐, 할 수 있어!"

나는 운전에 대해 무척 겁쟁이였다. 지금도 무섭기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서울에 사는 동안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 누구보다 뚜벅이 생활을 좋아했다.

버스도 지하철도 택시도 기차도 관광버스도 그리고 비행기까지 웬만한 대중교통은 다 좋아했다.

대중교통으로 웬만한 곳까지 편하게 갈 수 있다는 장점은 늘 나를 설레게 했다.


한 번은 퇴근길에 잡자기 부산에 가고 싶어 졌다. 퇴근 복장으로 무작정 중간 역에 내려서는 기차표를 확인하고 서울역으로 향했다.

그리고 부산 가는 기차에 올라탔다. 그것도 대중교통의 묘미가 아닐까?

이런 묘미를 두고 어찌 설레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첫째를 출산하고는 아이와 캐리어만 챙겨 부천 친정집을 가기도 하고 동생이 있던 부산을 가기도 했다.

집 앞에 나오면 버스도 지하철도 웬만한 곳까지 갈 수 있고 집 앞에는 늘 택시들이 줄을 지어 있었으니 가끔 이용하면 지하철의 불편함을 해소하고,

아무래도 육아를 하다 보니 생활 반경이 넓지 않아 더욱 불편함이 없었던 것 같다.


둘째를 막 출산하고 집에서 육아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근처에 살고 계시는 시어머님께서

아니다. 엄연히 따지자면 내가 어머님 집 근처에 살고 있었을 때였다.

어쨌든 그때는 어머님도 연수 중이셔서 만날 때마다 운전을 한번 해보라고 이야기하셨었다.

필요함을 전혀 못 느끼다 보니 그 말들은 그저 남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우리 어머님도 대단하시지! 어느 날 그런 며느리의 이름으로 운전면허학원에 등록을 하고 오셨다.

"다음 주부터 운전면허학원 가서 하는 대로만 하면 면허는 금방이야! "

적지 않은 돈을 덜컥 지불하고는 대리등록을 하고 오셨다니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 돈을 전부 환불받을 수도 없고, 결국 난 학원으로 몇 주를 나갔던 것 같다.

학원을 다니면서도 '면허만 따자! 돈이 너무 아깝잖아...'라고 생각했지, 운전을 할 마음은 정말 손톱만큼도 없었다.


교육은 지루했고, 한번 떨어진 도로주행 시험으로 잔뜩 쫄아서는 면허증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흔히 말하는 장롱면허가 시작되었다. 신분증이 하나 더 생긴 샘이었다.

나름 비싼 신분증... 그것이 내 운전의 마지막이라 생각했다.


사람일은 모른다더니 우리 가족은 모두 양주로 이사를 했다.

쌍둥이를 임신하고 현재 살고 있는 집으로는 힘들겠다 싶어 집을 옮겨보고자 이리저리 집을 알아보고 다니는데 집값도 문제지만 오래된 아파트들 뿐이어서

그 동네에서는 인테리어 비용까지 계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연한 기회에 남편의 사무실을 알아보던 양주에 신도시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고민 끝에 우리 가족과 시댁 식구들까지 이곳으로 함께 이사하게 되었다.


이사 와서도 아이들 유치원과 어린이집을 6개월 정도 보내다 보니 이곳보다 전에 살던 동네가 익숙하고 그리워 동네를 찾고 그 동네 사람들을 만나고 하는데 이게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신도시라고는 하지만 개발 중인 시골 동네로 이사와 버스 간격이 45분이 넘는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고, 양주역에서 집에 오는 버스도 한 대 뿐이었다.

집 앞에는 택시 한 대를 찾아볼 수 없었다. 가끔 세워진 택시에 타려고 하면 이미 예약된 차량이었던 것이다.


카카오 택시 어플을 다시 깔아 놓고 필요할 때마다 콜을 불러 애용해야 했다.

더 충격적인 것은 택시요금이었다. 처음으로 지역마다 택시 요즘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본요금은 같은데 올라가는 요금 속도가 어찌나 빠르던지, 내 눈을 의심했다.

마트에 가려면 택시비를 2만 원 정도 지불해야 하니 운전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어야 큰 마트로 장을 보러 갈 수 있었다.

내가 동사무소 일이나 은행일을 보려면 남편은 그날 아주 늦은 출근을 하거나 하루는 일을 못해야 했었으니까, 남편이 말하기를 " 회사원이었으면 어쩔 뻔했냐? "

정말 이곳에 사는 일이 쉽지 않았다.


새 아파트로 이사와 집이 넓고 쾌적해졌으며 주변에 공원도 가까이 있고 아이들 키우기 참 좋다고 늘 생각은 했었지만 우물 안 개구리처럼 동네를 떠나기가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개발 중인 동네여서 지금보다 몇 배는 생활이 불편했으니 말이다.

나 스스로가 운전연수를 생각한 것은 이 모든 불편함 때문이었다.


그렇게 40만 원이라는 큰돈을 또 들여 운전에 투자를 하기는 했는데 과연 잘할 수 있을지 이러다 못하고 그 돈만 날리는 건 아닌지에 대해 나를 꽤나 의심했었다.

결국 4회의 연수가 끝나고 동네에 차를 몰고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은 집에서 첫째, 둘째 유치원을 데려다주고 주차를 하고 다시 이동하고를 반복했다.

짧은 거리이지만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그리고 유치원보다 조금 먼 마트에 장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다른 동네로 장 보러 가고 아이들을 데리고 키즈카페도 가고

식당도 가고 예전 살던 동네까지 가는 일이 어렵지 않아 졌다.


이곳으로 이사와 마음을 나누던 꽃집 사장님들께서 한참 연수중이라고 이야기했을 때 이런 말을 했었다. "언니, 운전하면 삶의 질이 달라져요!"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의 내가 조금은 느끼고 있다.


남편은 지금도 종종  "아! 민댕이 운전하는 차를 타다니..."라고 말한다.


그 좋아하는 카페를 내가 움직여 갈 수 있다는 즐거움이 정말 크다.

동네지만 걸어 다닐 수 없는 거리의 카페들을 하나씩 투어해 보는 게 너무 즐거웠다.

코로나 이전에는 혼자 커피를 한잔 하고 오는 여유도 생겼었다. 누군가가 없어도 나는 이곳에서 즐 길 수 있게 되었다.

예전 같았다면 집 앞에서만 움직이고 누군가의 도움 없이 어딘가를 가기가 힘들었을 텐데 나의 삶의 질이 달라진 건 확실하다.


한 번은 저녁에 셋째의 팔이 빠진 적이 있었다.

근처 정형외과는 모두 다 닫은 시간이어서 큰 병원까지 나는 운전하고 어머님은 셋째를 안고 병원으로 향했었다. 그때 문득 '아! 운전하길 잘했다.' 싶은 마음이 들었었다.


하지만 얼마 전에는 어머님께서 이모님 댁에 가신다고 하셔서 우리 가족 모두가 함께 움직인 적이 있었다. 고속도로도 한번 가볼까 하는 욕심으로 출발했다가 첫 휴게소에서 남편과 자리를 바꾸었다.

동네를 운전하던 쫄보가 넓은 고속도로를 나가보려 하니 세상 무섭고 긴장이 되어 도저히 괴산까지는 못 내려가겠더라, 시내 길이 고속도로보다 편안한 아직은 초보운전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운전하는 것에 겁먹고 있다면 나도 그렇게 말해 줄 것 같다.

"나도 하잖아, 난 아직도 무서워! 그래도 한번 해보면 많은 게 달라진다!"라고

여느 누구와 같은 말을 하겠지만 사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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