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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령 Aug 02. 2019

요가하는 해파리 9

요가가 없는 날에는

초록이 넉넉하며 물기가 가득한 산은, 언제 가도 반갑다. 질리지가 않은 것이다. 해가 아직은 저물지 않은, 저녁 산책. 우리 집 옆에는 관악산이라고, 산이 하나 있는데 꽤 크고 정돈이 잘 되어있어서 등산은 물론이고 산책하기에도 좋다. 나 같은 경우는 하루 마무리를 요가로 끝내는데, 요가 선생님이 쉬는 날이면 대신 여기에 온다. 와서 종일 시끄럽고 복잡했던 머릿속을 비우는 것이다. 멍-하니. 집에서 출발하는 시각은 대개 오후 여섯시에서 여섯시 반 사이인데, 아무리 가벼운 산책일지라도 가는 장소가 산인지라 날이 저물면 무섭긴 무섭다. 네 발 달린 짐승이든 두 발 달린 짐승이든 꼭 무언가 튀어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인 까닭이다. 두툼한 구름. 구름보다 분량이 많은 하늘.


빈 주머니에 양말은 신지 않은 차림새로 오늘도 산책길을 걷는다. 내가 가는 길은 여기에서 저기까지 늘 같다. 늘 같은 까닭은, 여기 이상 깊이 가면 등산코스로 이어지기도 하거니와(등산은 절대 사양이다.) 나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심각한 길치인지라, 오늘은 모험삼아 여기로 가볼까? 괜히 새로운 옆길로 가보았다가 길을 잃어버릴까봐 겁이 나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호기심은 있는데 엄청난 겁쟁이다. 그래도 나는 굉장히 만족하고 있다. 다람쥐가 쳇바퀴 돌듯이 갈 때마다 같은 길이 반복이지만 거기에서도 항상 새것은 발견된다. 내 생각에 아무래도 산은, 매일매일 무언가를 낳는 것 같다. 그리고 잘 키운다. 여름. 이어지는 초록색, 콸콸 흐르는 얕은 계곡물. 물소리가 시원하다.


20분쯤 걷다보면 중간에 쉬기 딱 좋은 장소가 있다. 크고 작은 바위들이 무더기로 있고 밑으로는 계곡인 곳. 계곡은 물의 양이 그리 깊지 않고 물살이 세지 않아서, 내려가서 발이라도 담가 볼까? 이런 마음이 올 때마다 드는데 딱 거기까지. 실제로 발을 담근 적은 없다. 왜냐하면 바위, 바위, 바위를 딛고 내려가다가 미끄러져 구르기라도 하면 머리를 크게 다칠 테고, 지나가는 사람이 드문 지금 여기서 기절이라도 하면 누가 나를 구해주나, 라는 생각 때문이다. 살다가 호상은 못 누릴지언정 객사는 싫다. 그렇기도 하고 앞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겁이 많은 사람이라 내려가는 계단에서도 발을 헛딛을까 봐 살짝 긴장을 할 정도다. 그런 주제에 여기에 오면 꼭 가다 멈추고 와서는 쉰다. 느긋하게 물소리를 듣고 싶은 거다. 평평하니 앉기 딱 좋은 바위를 골라서 털퍼덕 앉는다. 끝없이 이어지는 기운 찬 물소리들. 각각 높낮이가 다르다.  


  “좋다.”


벌러덩 뒤로 눕는다. 누워서 하늘을 본다. 뺨에 스치는 얇은 바람. 바람은 더운 여름이지만 산뜻해서 기분이 좋았다. 울창한 숲. 무럭무럭 자란 갈색, 반짝반짝 빛나는 초록색. 누워서 보는 하늘은 나뭇가지에 둘러싸여 동그라미 모양이다. 이렇게 나무에 둘러싸인 하늘 안에 있는, 무언가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게 달이든 구름이든 해이든. 달이면, 파란색, 갈색, 초록색, 노란색이라서 좋으며 구름이면, 파란색, 갈색, 초록색, 하얀색이라서 좋고 해이면, 파란색, 갈색, 초록색, 빨간색이라서 좋다. 세상 단순하고 간단한 이유. 아까 두툼했던 구름은, 선량하게도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흐트러져 모양새를 바꾸었다. 마치 솜뭉치를 손으로 떼다 여기저기 던져놓은 그림. 허허, 어디선가 구름의 성격 좋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두께가 옅은 구름 하나. 나는 보이지 않아도 구름 하나 너머에도 하늘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는 것을 안다. 파랗고 멋진 하늘이.


  첨벙!


멍하니 있는데 첨벙 소리가 들렸다. 누가 있나? 일어나 본다. 보니, 덩치 큰 개 한 마리랑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하나. 검고 하얀 털이 긴, 참 멋진 개였다. 첨벙 소리는 개가 물에 뛰어드는 소리였고. 둘 다 나처럼 산책을 나온 모양이었는데 수면에는 축구공을 본뜬 비치볼이 둥둥 떠 있었다. 개는, 비치볼을 이리 튕기고 저리 튕겨가며 물살을 거침없이 헤집고 다녔다. 꽤 떨어진 거리였지만 멀리서 보기만 해도 내가 다 즐거울 정도로 신난 몸짓이었다. 순수하고 자유로운.


  “착하네.”


넋을 잃고 구경하다가 착하네, 그렇게 말한 까닭은 주인을 보고 한 소리였다. 일부러 여기까지 산책 나와서 물놀이까지 시켜주는 주인의 마음씀씀이에 감동해서 말이다. 본인은 물 바깥에 서서 개가 노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개가 너무 흥분한 나머지 지나치게 멀리 튕긴 공이 얕은 물가로 올 적마다 맞받아 개에게 다시 돌려줬다. 개의 안전을 살피고, 개가 혼자 외롭지 않도록 하면서, 멀리 튕겨진 공 때문에 개가 좋아하는 물속에서 나와야하는 수고로움까지 덜어주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온 마음을 개에게 쏟아 붓고 있었다.  참 다정하고 배려있는 마음씨.


  “좋다.”


둘을 보고 있자니 나도 거기에 껴서 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진짜로 그렇게 할 정도로 넉살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서 상상만 했다. 좋다, 또다시 벌렁 뒤로 누워서 하늘이나 본다. 새가 한 마리 하늘을 가로지른다. 차가운 바위, 나무 냄새, 흥얼흥얼 콧노래.


언제 가려나? 나는 그들이 집에 갈 때까지 기다렸다. 개가 노는 모습을 보니 나도 물에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에 도저히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겁쟁이 내가 평소라면 절대 내려가지 않을 저곳이지만, 마음먹고 바위, 바위를 딛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기다렸다가, 

  “안녕.”

잘 가라는 인사를 혼잣말로 하고 내려갔다. 거의 네 발로 기듯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거의 다 내려왔다 싶었는데, 어? 더 이상 갈 길이 없었다. 분명 저기 내 자리에서 봤을 때는 이대로 바위를 타고 내려가면 물에 닿을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다. 하...... 정말이지 나란 사람 질린다.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흔들고는 그대로 다시 바위를 타고 되돌아 올라간다. 잉차잉차, 조심조심. 다 올라와서는,


  “아, 즐거웠다.”


나는 만족한다. 비록 크게 마음먹고 하려했던 물장구는 못 쳤지만, 이만하면 충분히 재밌었다. 깨끗한 공기도 많이 마셨고. 온 몸도 초록색으로 가득 채웠다. 


  “랄랄라아~”


돌아오는 길에는 개가 놀던 장소에 가는 방법을 찾기로 했다. 내가 생각했던 길이 아니라면 다른 길이 있겠지, 그래서 산책길을 내려오면서 옆길을 기웃기웃 봤는데, 어떻게 갔지? 통 알 수가 없었다. 설마 슝- 날아서 갔을 리는 없을 테고. 내가 워낙 길눈이 어두운 사람이라 길을 못 찾는 것이겠지만, 왜 내 눈에는 안 보이는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혼자 심각해져서는 고민한다. 그러다가,


  “랄랄라아~”


아무려면 어때, 다음에 오면 그때 또 찾아보기로 한다. 그들이 가기를 기다리느라 산책 시간이 길어져서 돌아가는 발걸음이 조금 빠르다. 집에 가면 씻고 밥 먹어야지, 생각한다. 오늘 저녁에 먹을 식사 메뉴는 잡곡밥, 양파가 들어간 감자볶음,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계란프라이. 내일은 월요일이라 회사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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