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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령 Aug 26. 2020

요가하는 해파리 21

청학동 이야기, 둘.

물 좋고, 공기 좋고, 청학동이란 곳은 참 좋은 곳이었다. 나처럼 하늘 보고 햇볕 쬐고 바람이나 실컷 쐬면서 무럭무럭 자라는 게 취미인 사람한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최상의 장소였다. 그랬다. 그랬는데.......     


  “부생아신, 아버지는 나를 낳으시고. 모국오신, 어머니는 나를 기르셨도다.”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을 줄이야. 하얀 것은 종이고 까만 것은 글씨, 나는 서당에 들어앉아 사자소학을 줄줄이 외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물론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여기 온 모든 예사들이 거쳐야 할 교육 중에 하나 였으니까. 본격적으로 예사로서 본분을 다하기 위해 우리들은 여러 가지를 배웠다. 안 훈도님의 가르침에 따라 다도, 기본예절 등등을 배웠으며 오늘은 사자소학을 외는 날이었다. 뜨거운 오후, 열린 장지문 밖으로 보이는 마당에는 빨갛고 큰 꽃이 피어있고 하얀 나비가 날아다니고, 매미가 울고, 나는 저 끄트머리에 앉아 부러운 눈길로 밖을 바라보았다. 어쩌고 저쩌고 읊어대는 예사들의 낭랑한 소리.     


  “미진 예사님.”     


나를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안 훈도님의 안경테는 은색이고 위아래 옷은 모두 회색인 데다가 늘 그렇듯이 머리를 길게 땋으셨다. 네? 무슨 질문을 하려고 부르셨나 긴장하며 나는 훈도님의 날카로운 눈빛을 바라보았다. 모든 예사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어 가슴이 콩닥콩닥했는데, 정말이지 나는 주목받는 것이 부끄럽다.      


  “사자소학에 따르면 아버지는 나를 낳으시고, 어머니는 나를 기르셨다는데, 어떻게 그리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듣고, 질문의 뜻은 단박에 이해했다. 그러니까 훈도님 말인즉슨, 아버지는 남잔데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느냐 그런 뜻이 아니겠는가? 허허 참. 그걸 내가 어찌 알겠는가? 난감할 세.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맴맴맴. 매미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조금 머뭇대던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대답했다. 하고 싶은 말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천천히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그러니까, 저희가 어머니 뱃속에 들어가 태어나기 전에는 아버지 뱃속에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 배에서 나왔으니까 아버지가 나를 낳으신 셈입니다.”     


  “.......”     


나, 제대로 정리해서 얘기했나? 어째 버벅댄 거 같은데. 내 대답은 끝났는데 훈도님은 말씀이 없으셨다. 분위기가 어째 심상치 않아서 나도 잠자코 있었더니 저쪽에서, “야하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남자 예사들 중 하나였다. 안 훈도님이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이어서 들리고 나는 고개를 푹 숙여 얼굴을 가렸다. 어째 크게 잘 못한 기분이었다. 

     

우리는 다음으로 넘어가 계속 사자소학을 외웠다. 훈도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나는 지금도 모른다. 훈도님이 정답을 얘기 해줬었는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는데 그도 그럴 것이 나는 그 뒤로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딴 생각에 빠져있었다.      


아니, 그럼, 남자가 어떻게 얘를 낳아?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는 자력으로 딸 아테네 여신을 낳았다는데, 그럼, 뭐, 사자소학에 나오시는 아버지는 신이라도 된단 말인가? 아니면 뭔데? 사자소학이건 뭐건 다 때려치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제도 억울, 오늘도 억울, 나 여기 와서 계속 억울하네. 아무래도 청학동에 온 거, 내가 경솔한 짓을 저지르고만 것 같았다.     

 

  “누구 사진 찍을 줄 아는 사람 있습니까?”     


이제 곧 아이들을 받을 때였다. 오늘 공부가 끝나고 훈도님이 그렇게 물은 까닭은 아이들을 지도할 예사 말고도, 다른 업무를 도맡을 예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 업무란 아이들이 활동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고 게시판을 담당하고 뭐 이런저런 일이란다.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솔직히 나는 사진을 모른다.      


  “신문방송학을 전공했어요.”     


전혀 관련이 없는 얘기다. 없는 얘긴데 어째 훈도님은 고개를 끄덕끄덕하셨다. 기뻐해야 할 일인지 아닌지, 좀 애매하지만 훈도님은 그 일을 내게 흔쾌히 맡기셨다. 아싸! 이제 사자소학 안 외워도 된다! 예절공부 안 해도 된다! 차 우리는 거, 그것도 안 해도 된다!      


나는 기본적으로 얘들하고는 친하지가 않다. 아이들 뒤치다꺼리라니 생각만 해도 어색하다. 그렇게 나는 양아치(?) 예사님의 길로 접어들었다. 다른 예사들은 이제부터 아이들에게 모범을 보이며 엄격한 선생님 노릇을 해야 하는데 나는 그들의 세계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른 예사들과 친해질 수 있는 기회가 점점 더 없어지겠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여기 온 첫날부터 이미 내편 네편이 갈려서는 서로를 견제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넌더리 나서 끼어들고 싶지 않던 참이었다. 여자들이란, 편 먹고 가르기를 참 즐기는 종족이다. 쯧쯧. 훈도님이 내게 맡기신 디지털카메라는 목에 걸 수 있도록 끈이 달려있고 꽤 무거웠다. 요즘 같은 스마트폰 시대에 디카가 웬 말이냐고 하겠지만, 그때는 그랬다. 그땐 스마트폰이라는 것이 없었고, 내가 가진 폰은 노란색 두툼한 폴더 폰이었으니까. 어쨌든 사진 그까짓 거,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심정으로 카메라를 받았다. 그 카메라, 비쌉니다. 라고 말씀하시는 훈도님의 눈빛은 무언가를 신신당부하고 있었다. 아, 네네.     


저녁, 맛있게 저녁 식사를 하고 오늘도 나는 반 팔 티셔츠를 수건 삼아 씻어야 했다. 공동욕실, 싸늘한 돌바닥, 수도꼭지, 바가지, 빨가벗은 나는 쭈그리고 앉아 바가지에 물을 받았다. 물이 굉장히 찼다. 아, 차거! 찬물을 끼얹고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네모나고 조그만 창문, 까맣고 네모난 하늘에는 보름에서 조금 모자란 달이.      


나는 열심히 열심히 찬물을 몸에 끼얹었다. 그렇게 몇 번을 했는데, 저기 미진 예사님 물이 튑니다, 라고 퉁명스럽게 말하는 예사는 쌍둥이 예사 중 언니였다. 예사들 가운데 쌍둥이가 하나 있었는데 일란성이라는 그들은 신기할 정도로 닮지 않아 나를 놀라게 했다. 언니 쪽이 어째 좀 까칠하게 생겼는데 실제 성격도 동생 쪽이 더 서글서글했다. 둘이 쌍둥이라는 동생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더니, 안 닮았죠? 하면서 무슨 뜻인지 다 안다는 표정을 지었었다. 속마음을 들킨 것이 민망해서 헤헤 웃었더니, 태어나서 언니가 많이 아팠다고 동생이 언니를 변호하듯 말했다. 아파서 언니는 따로 떨어져 조부모 손에서 자랐는데,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성격이 아주 예민하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아무리 쌍둥이라지만 사람은 역시 꼴값하고 살기 마련이구나, 사람은 생긴 대로 논다는 말을 떠올렸다.      


  “아, 죄송해요.”     


나는 쭈그린 자세 그대로 엉금엉금 이동을 했다. 멀리 떨어져서 마무리를 하고, 마지막으로 빨래를 하려고 했다. 위아래 속옷, 양말, 모두 비누칠을 해서 손빨래를 하는데 또 다른 예사 하나가 들어왔다. 빨래하는 내 모습을 물끄러미 보더니, 지금 세탁기를 돌린다는 정보를 주었다. 세탁기요? 나는 눈을 깜빡깜빡했다. 세탁기가 있었다니 금시초문이었던 까닭이었다. 여기에 계속 있으면서 손빨래를 해야 하는 줄 알고 걱정했는데 세탁기라는 신문물의 등장에 신이 났다. 세탁기가 있는 장소까지 얻어듣고 바로 그곳으로 직행했다. 갔더니 윙윙하고 돌아가는 세탁기가 있었고 나는 뚜껑을 열어 내 옷들을 집어넣었다. 속옷 정도는 그냥 내가 빨까 했는데, 그게 그러니까 귀찮아져서는 아무 생각 없이 그랬다. 그게 나중에 엄청난 창피함을 가져올 줄은 꿈에도 모르고 말이다.      


  “저... 세탁기에 빨래 넣으신 분.......”     


잘 시간을 앞두고 쉬고 있는데 남자 예사 하나가 여자 예사들이 묵는 방으로 찾아왔다. 들어오지는 못하고 밖에 서서는 세탁기에 빨래를 넣은 사람을 찾았다. 뭔가 무지하게 난처해하는 얼굴이기도 했고 묘하게 웃음을 참는 얼굴이도 했다. 순간 나는 벌떡 일어났다.      


  “어머나!”     


후다닥 밖으로 나와 고무신에 발을 집어넣었다. 미쳤어, 미쳤어, 내가 미쳤지. 남자 예사들이 묵는 방으로 달려간 나는 벌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세탁기에서 꺼낸 남자 예사들의 빨래가 봉긋하니 쌓여있었는데 맨 꼭대기에 내 속옷이 참 다소곳하게도 올려져 있었더랬다. 위아래 전부다. 고개를 푹 숙인 나는 그것들을 휙 낚아채었다. 보지 않아도 킥킥 웃어대는 남자 예사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너무 창피했다. 고무신에 발을 집어넣고 가려는데, 저기, 하고 나를 부르는 소리에 멈칫하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것도.......”     


이것도, 라며 건넨 것은 내 양말이었다. 무지개 색깔이고 줄무늬인 내 양말 두 짝. 아랫입술을 질끈 물고는 그것도 휙 낚아채듯 챙기고 돌아섰다. 바보 멍청이 왜 나는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세탁기에 빨래를 집어넣어서 이 꼴을 당할까? 터덜터덜 돌아오는 길에 한숨이 푹푹 나왔다. 까만 밤, 별, 이렇게 어두운데도 구름의 색깔은 하얗게 잘만 보였다. 그게 좀 신기해서 우뚝 서서 멍하니 쳐다보았다. 가만히 생각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세탁기 쓸 타이밍을 맞춰야 하나? 속옷이든 뭐든 손빨래는 정말 귀찮은데. 세탁기 하나에 모르는 사람들과의 공동생활이란 것은 참 불편하네.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내리고, 나는 자러 갔다. 아무튼, 나는 내일부터는 공부를 안 해도 된다. 나이스.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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