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얗고 노랗고 여기저기 난리가 났다.
요즘 우리 동네 산은 난리가 났다. 그러니까, 여기저기 하얗고 노랗고 꽃들이 만발이라 정신이 혼란스러울 정도로 보통 난리가 아니라는 얘기다. 봄, 하얀색 얼룩무늬 하늘, 개나리의 오밀조밀한 노랑, 목련의 넉넉한 하양, 동백의 담백한 빨강, 꽃나무 가운데 가장 많은 벚꽃은 흰 기가 도는 분홍이다.
꽃. 하나하나 가까이서 보면 내가 마치 빨려 들어가는 기분에 빤히 보게 되고, 멀리 두고 감상하면 반대로 온 색깔에 흠뻑 젖는 기분이라 멍-해지고 만다. 둘 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니 난리가 났다고 말할 수밖에.
오늘은 쉬는 날이다. 쉬는 날 이른 오전에 하는 산책은 나의 취미이자 습관이다. 늘 그렇다. 일어나서 세수도 하지 않고 집 앞에 있는 산으로, 주머니에는 마음 편한 장소에서 마실 것이 있는데 오늘은 사과 맛 주스다.
나는 씩씩하게 걷는다. 겨울을 보내고 그렇게 기다리던 봄이 왔으니, 그때보다 더 열심히, 열심히, 걸었다. 길은 사람 하나 보일까 말까 한적하기 그지없고 꽃들은 무지하게 예쁘고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해는 조그맣고 동그라미 모양이다.
응달보다는 양달을 골라가며 걷는다. 따끈한 햇볕, 눈을 감아 눈꺼풀에도 양껏 쬔다. 바람결을 따라가는 순한 물결. 햇살은 잔물결 위에도 내려앉아 반짝반짝 빛났다.
“예쁘다.”
이렇게 하루도 빠짐없이 기분 좋은 것들에 둘러싸여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일 년에 한 번은 꼭 보는 개나리고 목련이고 벚꽃이지만, 역시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두근하다. 봄이 오면 어떻게 알고 계절에 딱 맞추어 움을 틔우고 꽃을 피운다.
정말 좋다. 한결같은 마음이, 성실한 태도가, 사람 마음을 설레게 하고 안심시킬 줄 아는 고단수들이다. 감상만 하다가 마음이 동해서 개나리 나뭇가지 하나를 손에 쥐었다. 한 손에 잡히고도 남는 나뭇가지는 가느다랗고 단단했다. 나뭇가지를 뚫고 돋아난 싹들은 연두색이고 초록색이고.
“멋지다.”
이렇게나 단단한 몸체이고 나무껍질인데, 이렇게나 조그맣고 부드러운 잎들인데 어떻게 뚫고 나왔을까 감동 그 자체이다. 정말이지 얘도 멋지고, 쟤도 멋지고, 멋지고, 멋지고, 모두 멋지다.
시린 겨우내 움틀 기회만을 기다렸을 인내심, 기다리는 동안 지치지 않기 위해 햇볕 한 줌 물 한 방울 꽉 쥐고 있었을 깡다구, 그리고 움틀 때를 놓치지 않고 온 힘을 아낌없이 쏟아붓는 폭발적인 자력,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벅차다. 바람이 분다. 기분이 좋아 흔드는 강아지의 꼬리 같은 초록색 나뭇잎, 아주 귀여운 바람이 불고 있다.
준비해 간 사과 맛 주스를 맛있게 마시고 집에 돌아가기로 한다. 다음 쉬는 날에 와도 거의 그대로일까? 떨어지는 벚꽃잎들을 보자니 아쉬운 마음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여기저기 눈을 돌리다가, 시기가 아니라서 꽃이 피지 않은 철쭉나무를 발견했다. 안심이다, 라고 생각했다. 아직 봄이 남아 있어서 안심이라고. 흠흠흠- 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반대편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나는 거의 끝 지점, 저 문만 통과하면 산을 나간다. 룰루랄라 걸어가는데 맞은편에서 사람이 하나 내 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누구? 얼굴을 바로 알아보지 못해 가던 길을 멈추고 갸우뚱했다. 나는 시력이 그다지 좋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렇게 멍하니 서 있는 와중에도 기다란 팔다리로 성큼성큼 오는 모양새를 보고는, 참 시원스럽네, 이런 생각을 했다.
“안녕하세요!”
누군지 알아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손을 덥석 잡았다. 우리 요가 선생님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과거 요가 선생님이었던 우리 요가 선생님인데 설명하자면 얘기가 길어진다. 내가 그렇게 동경해 마지않던, 그래서 인사하는 것조차 쑥스러워 멀리서 보면 빙 돌아갔던, 안타깝게도 다니던 헬스장이 문을 닫는 바람에 헤어져야만 했던 우리 요가 선생님.
여기서 이렇게 만나니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지고 말았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손을 잡고 붕붕 흔들었다. 헬스장 문 닫은 지가 작년 말이고 올해가 되어 처음 만났으니 이렇게 반가울 수밖에. 또 내가 알기로는 선생님은 이 동네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런 만남이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나를 알아보고 굳이 저기서 다가와 인사해주는 마음이 고마웠다. 더 감격인 건 마스크를 쓰고 있는데도 알아봤다는 것이다. 반가워요, 너무 반갑다, 어떻게 지내세요? 요즘 코로나 때문에, 맞아요, 어떻게 너무 반갑다, 딱히 서로 할 말은 없는 것 같았는데 어쩐지 둘 다 손을 쉽게 놓지 못하고 붕붕 흔들기만 했다. 그러다가 남자 친구라며 선생님이 옆에 있는 남자를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나는 꾸벅 예의 있게 인사를 했다.
“안녕히 가세요”
짧고 강렬한 만남을 뒤로하고 산을 나왔다. 들뜬 기분이 채 가시지 않아 콩닥콩닥 심장이 뛰었다. 즐겁다. 새록새록 밝은 기운이 몸 전체에서 피어나는 것 같다.
“아자! 아자!”
아닌 게 아니라 요즘 여기저기 세계가 난리가 났다. 코로나19. 다들 난리도 보통 난리가 아니게 되었다. 나만 해도 늘 마스크를 착용한 채 나다녀야 하고 일도 해야 하니 불편하고, 쉽게 만났던 친구도 보고 싶지만 자제해야 하니 따분하고, 요가 수업도 계속 못 가고 있다.
무엇보다도 제일 문제인 것은 불안한 마음이다. 불안한 마음은 전염되는 속도가 바이러스보다 빠르다. 조심조심, 아슬아슬, 봄은 왔지만 다들 살얼음판을 밟은 기분으로 매일을 살아가고 있는 요즘. 우리,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그래도 봄은 반드시 오고, 꽃은 반드시 핀다. 세상일은 꼭 그렇게 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우리도 자기 자리를 꿋꿋이 지키며 기운을 냈으면 좋겠다. 봄날의 꽃들처럼 인내심을 가지고, 깡다구를 가지고, 그렇게 있다가 그날이 오면 어마어마한 힘을 빵! 하고 터트리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히죽 웃음이 난다. 히죽히죽, 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