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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령 Dec 14. 2019

요가하는 해파리 18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짝반짝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말 뒤에는 어쩐지 희망 찬 말이 올 것만 같은 까닭이다. 의지가 있고, 밝고, 선량한 말들이 줄줄이.


모두가 그렇진 않겠지만 나 같은 경우, 출근하는 아침에는 기분이 착 가라앉아있다. 사계절 내내 대부분 그러한데 특히 겨울에는 더 그렇다. 일단, 잠에서 깨어나면 이불속에서 나오기 싫다. 그래도 일어나야하니까 일어난다. 얇은 민소매 치마 잠옷에 카디건을 걸치고 거실로 나온다. 베란다로 나가는 유리문의 커튼을 걷으면 밖은 아직도 어두침침하다. 겨울이라 해 뜨는 시간이 늦어진 것이다. 춥고, 어둡고,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가 귤이나 까먹고 싶은 심정이다. 그래도 회사는 가야하니까 어찌어찌 준비하고 집을 나선다. 


나는 회사에 가려면 대중교통을 두 번 갈아타야한다. 우리 집에서 지하철역까지 버스를 타고 한 번, 내려서 회사까지 지하철로 두 번 이렇게. 어느 출근길이나 복작복작하고 꽉 막히기는 마찬가지일 터. 내 경우는 특히 집에서 역으로 가는 버스가 장난 아닌데, 각 정류장마다 사람들이 타다보면 나중에 역에 거의 가까워질 때쯤에는 꽉꽉 차서 버스 뒷문이 안 닫힐 정도다. 뒷문이 닫히지 않으면 삐- 소리가 나고 버스는 출발하지 못한다.


  “올라서세요!” 


앞에서 소리치는 버스기사님 목소리가 다소 거칠다. 제일 밑 계단에 서 있던 누군가가 겨우겨우 계단 하나 올라오고 나서야 뒷문은 닫힌다. 이런 광경을 늘 지켜보면서 나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집이 종점이라서 나는 정말 다행이라고.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면, 우리 집은 종점이라 내가 버스에 탈 때면 버스는 텅텅 비어있을 때가 많다. 사람이 있어봤자 한 명, 두 명 정도. 대개는 버스기사님한테 내가 첫손님인 셈이다. 그러니 나는 내가 좋은 좌석을 골라 지하철역까지 편하게 갈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자리는 뒷문 근처, 교통카드단말기가 가까운 좌석이다. 거기에 앉으면 손만 뻗어서 쉽게 교통카드를 미리 찍을 수가 있다. 그러면 나중에 도착해서 우르르 내리는 상황에서 남들은 교통카드를 찍으려고 멈칫해야하는 일이 생기지만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 


그냥 숑- 하고 밖으로 빠져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런 행위가 마음에 들고, 그래야 안심이 된다. 아무튼 나는 이렇게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침마다 버스를 타는 게 큰일이겠다 싶다. 회사는 가기 싫은데 회사에 가는 길은 차도 많고 사람도 많아 숨이 턱턱 막히니, 이러니 다들 사는 게 힘들다고 하지. 


바빠서 내 갈 길이 먼저다. 후딱후딱 해치워버리고 싶은데 기다려야하고 장애물이 많아 어느 것 하나 내 마음대로 안 된다. 자기라고 이러고 싶을까. 세상이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를 않는데. 눈물을 머금고 버틸 수밖에, 모진 마음먹고 싸워서 이길 수밖에. 


다음이 마지막 정거장, 나는 머리를 창문에 기대고 눈을 감고 있다가 눈을 떴다. 거의 꾸벅꾸벅 졸았다고 말할 수 있는데 게슴츠레 눈을 뜨니 역시나 사람들이 잔뜩 있다. 무슨 테트리스 게임도 아니고 서로 몸이 끼이고 끼여서, 뒷문 계단에 있는 사람은 뒤꿈치가 붕 떠서는 계단 끝에 매달려 가는 수준이다. 대단하네, 이런 상황에서도 스마트폰에 집중하는 몇몇 사람을 보며 나는 감탄한다. 정말 대단해, 내 스마트폰은 집에서 나오기 전부터 가방 안에 있는데. 삑, 요령 있게 손을 뻗어 단말기에 교통카드를 찍었다. 


항상은 아닌데 오늘따라 잠이 덜 깨서 찍고는 바로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진짜 자버리면 안 되니까 눈만 감고는 방송 안내 멘트를 기다렸다. 머리가 차다. 날씨도 춥고. 훌쩍. 나는 집에 가고 싶어진다. 그리고 귤이랑 데운 주스도. 주스, 데워서 마시면 참 맛있는데. 따끈따끈하니.


집에 가고 싶다를 마음속으로 몇 번 외치다보니 내려야 할 정거장에 도착했다. 눈을 뜨니까, 사람들이 하나, 하나, 내리고 있었다. 줄이 아닌 줄을 서서, 차례차례가 아닌 차례차례 단말기로 손을 뻗었다. 다들 멈칫멈칫한다. 좀 이따가 내려야지, 나는 앉아서 껴안고 있던 가방을 뒤로 매었다. 급할 거 없으니 사람들이 어느 정도 빠지기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거의 내리고 없을 때쯤 숑- 하고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이다. 단번에 숑 하고. 어쩐지 두근두근해서 양쪽 입술 끝이 실실 올라간다. 


그런데,


  쇼오옹-


하려는데, 누군가 내게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어? 마지막 계단을 내려오며 슬쩍 몸을 뒤로 뺐다가 덥석, 남자가 내민 것을 받았다. 다름 아닌 내 카드지갑이었다. 네모나고 납작하고 색깔은 파스텔톤 분홍색인. 아마도 단말기에 카드를 찍고 손에서 흘렸는데 몰랐거나, 무릎에 두고는 밑으로 떨어졌는데 몰랐거나, 하여간 칠칠치 못하게 하마터면 잃어버릴 뻔 했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집에 가고 싶다니, 데운 주스가 맛있다니, 나란 사람 아침부터 혼 좀 나야겠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손에 카드지갑이 없는 줄도 모르고 지하철역까지 갔다가 막상 단말기에 찍으려고 보니까 그제야 빈손을 확인하는 상황을. 난리도 아니겠지. 카드지갑에는 신용카드, 주민등록증, 이제껏 열심히 도장 찍은 커피 집 쿠폰이 있다. 그리고 나는 현금 하나 갖고 있지 않고, 여기서 우리 집까지 걸어서 간다면 못해도 40분이 넘고, 나는 지각을 아주 싫어한다. 생각만 해도 심장이 벌렁벌렁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진짜 감동했다. 이렇게 사람이 꽉 찬 버스에서 일부러 내 물건을 주워, 내가 내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건네주다니. 본인도 아침 출근길이 바쁘고 갈 길이 멀 텐데. 너무나 감사해서 나는 허리를 90도로 꺾었다. 답례로 커피라도 사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음 같아서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진짜 그가 허락했다면 바로 커피 집으로 끌고 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 남자는 자기가 한 친절한 태도가 쑥스러웠는지 뭔지, 감사합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쌩 하니 가버렸다. 어라? 나 되게 감사한데. 그래도 서로 웃는 얼굴로 눈이라도 마주쳤으면 좋았으련만. 흠. 바쁘시겠지.   


나는 그날 헌혈을 했다. 오늘 선량한 마음씨를 받았으니 나도 오늘 똑같이 돌려줘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인생만사 돌고 도는 것이라 했다. 어디 가서 나쁜 짓하지 말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으면 다른 누군가를 도와주며 살아야 한다고 했다. 


  “O형은 특히 많이 부족해서 본인도 어디 크게 다치면 안 돼요.”


이제부터 취미는 헌혈로 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세상을 위해 아낌없이 나눌 수 있는 것이 혈액이니 부지런히 드리기로 했다. 건강해야겠네, 밥 맛있게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하겠다는 생각도 했다. 이렇게 누군가를 위해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내 삶은 더 성실해진다. 남을 위해 한 일 같지만 결국에는 다 내게 다시 돌아온다. 희생이 아니라 희망인 것이다. 얇은 헌혈증, 왼팔에는 살색 반창고, 여기에는 나 말고도 다섯 사람이나 더 있다. 


안다. 다들 각자 살아가기 버겁다. 하고 싶은 일, 해야만 하는 일, 할 수 있는 일이 다 달라서 허우적대는 기분은 내가 쓸모없는 사람 같아 세상 살기 싫어진다. 나 하나 챙기기에도 보통 일이 아닌데 여기저기서 잔소리며 눈치를 주니 억울하고 외롭고 주눅이 든다. 겨우겨우 버틴다고나 할까. 어디 서러워서 제대로 숨 쉬며 살겠나?


그렇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살만 하다. 회사 출근은 싫지만 월급이 들어오면 친구랑 분위기 있는 카페에서 커피 한잔 할 수 있고, 겨울은 춥지만 귤은 밖은 추운데 따뜻한 이불속에서 까먹어야 맛있다. 세상은 하나만 있을 수가 없다. 반드시 둘 셋이 있고 양면이 있고 여러 개로 나눠진다. 다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르며 새로운 무언가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설레는 일일 테고. 나 혼자 같지만 우리는 서로가 보살피고 있다는, 같이 살아가고 있다는 분명한 자각. 


  “있지. 헌혈 50번하면 무슨 훈장 같은 거 준대. 금 색깔이었어. 반짝반짝.”

  “오! 그래?”

  “응. 그래서 나 그거 하려고.”

  “좋네. 반짝반짝.”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서로가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반짝반짝 빛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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