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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 Lee Apr 21. 2020

#24. 쿠알라룸푸르 5: 말레이시아 국립박물관

Museum Negara 말레이시아 국립박물관을 가다.

말레이시아 국립 박물관( Museum Negara )

1899년 설립된 셀랑 고르 박물관(Selangor Museum 1899-1945)이 1945년 연합군 측 공군 폭격으로 건물 일부가 손상되고, 컬렉션은 대부분 파괴되었다. 독립 2년 후인 1959년 정부는 건축가 Ho Kok Hoe를 임명하여 셀랑 고르 박물관 부지에 국립박물관을 짓도록 하였다.

1962년에 시작, 1963년 8월 31일 완성, 당시 왕이었던 양 디- 페르투안 아공 3세에 의해 Muzium Negara로 개관되었다.

건축 디자인은 전통 말레이 궁전의 특징을 살렸으며, 말레이시아를 구성하는 13개 주를 상징하는 기둥을 동쪽, 서쪽에 각각 13개씩 기둥을 세워 총 26개의 콘크리트 기둥이 건물을 받치고 있다.

셀랑 고르 박물관 (1899-1945)
국립박물관
박물관 내부 2층에서 건물 정면을 바라본 모습
내부 전시실, 우측은 시대별 지도

내부는 2층 규모, 4개의 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대별로 선사, 말레이 왕국 시절, 식민지 시절, 현대의 말레이 (GalleryD : Malaysia Today)등 4개의 전시실로 구분된다.


갤러리 A :선사시대 (Pre History Gallery )

초기 문명인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에 사용된 선사 시대 토기, 도기, 당시의 생활용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인류학자들에 의하면 말레이 인들은 남 중국에서 동남아시아로 2번의 큰 이주가 있었던 것으로 본다고 한다. 첫 번째는 후 석기시대인 10,000-8,000BC 년에 최초 "원 말레이"(Proto Malays) 이주가 있었고, 두 번째는 "신 말레이"(Deutro Malays)인들의 이주이다. 이들은 깊은 정글에서 산 계곡과 강변에 정착하며 살았다고 한다.

당시 동굴에서 살던 모습을 디오라마로 재현하고 있다.

동굴 거주하는 원주민들

 Perak Man 

약 10,000 – 11,000 년 전 이 나라에서 살았던,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되고 거의 완전한 인간 골격을 갖춘 Perak Man이 전시되어 있다. 1991년에 페라 크 렝공 (Lengong) 산 폐허 동굴에서 발견된 은인 (Silver Man)의 복제품이다. 이는 현대인 (호모 사피엔스)의 유골로 10,000 년이 넘는 고대 유적과 가장 완전한 해부학적 상태로 발견됨으로써 고고학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한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구석기와 신석기시대 사이로 추정한다.

발견 당시 다양한 동물의 껍질과 고기, 석재 도구 등 음식을 포함한 여러 장례 식품과 함께 웅크린 자세로 묻힌 채 발견되었다. 나이는 40~ 45세로 추정되며 당시 수명으로서는 오래 산 편이라고 한다.

부장품들로 보아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인물이었을 것으로도 추정한다고.


Tengkorak Homosapiens


그밖에도 석기시대의 도구, 장신구, 고고학 유적지 선사 시대의 동굴 벽화 그림 등을 볼 수 있다.

선사시대 동굴 벽화

갤러리 B : 말레이 왕국(Malay Kingdoms Gallery)

말레이 반도와 보르네오에 걸쳐 있던 여러 왕국들의 전시물로, 말레이 문명의 역사적 자취를 보여준다.

그중에서 특히 말레이-이슬람 문명의 역사에서 황금기였던 말라카 술탄국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전의 왕국들이 문헌이나 유물을 통해 현 말레이시아와의 관련성을 뒷받침할 수 없는 반면, 역사적 자료를 갖춘 최초의 왕국이  말라카 왕국이다.

말레카 왕국은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정부 시스템을 갖춘 최초의 군주제를 갖춘 왕국이다. 아울러 동서양을 연결하는 해상 무역을 통해 다양한 문화를 수렴, 발전시킴으로써 현 말레이 인의 문화적 특성과 발전의 바탕이 되었다고 보는 것 같다.

말레이 왕국의 왕좌, 금으로 만들어 화려하게 장식 한 왕족의 허리 버클, 왕실 전용의 배 머리에 장식했던 용머리 선수상 등이 특히 눈길을 끈다. 이 용 모양은 잭 프루트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콩줄기가 얽힌 모양이 새겨져 있다.

말라카 2대 술탄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장면을 디오라마로 재현하고 페라나칸 의상들도 전시되어 있다.

페라나칸은 ‘현지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의 말레이어다. 말레이 반도로 이주해 온 중국인 남성과 말레이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이들을 페라나칸이라고 하며 남성을 바바(baba), 여성은 논야(nonya)라고 부른다. 가부장적 중국인 남편 쪽 문화인 명절 · 예법 · 제사 의례 등과, 현지인 아내의 말레이식 음식, 식기, 의복 등이 접목되어 독특한 혼합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왼쪽: 왕실 뱃머리에 붙인 용머리 조각상,       오른쪽:관음보살상

관세음보살상 아발로 키테스바라(Avalokitesvara )

1936년  Perak의 Bidor에 있는 Anglo Oriental의 주석 광산에서 발견되었다. 청동으로 만들어졌으며 8개의 팔 중 하나가 파손되었다. 힌두-불교 시기인  AD 7 세기와 12 세기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무게 63kg, 높이 93cm이다.   

말레카 왕국 이전의 수리위자야 왕국은 번성한 불교국가였다.
말레카의 이슬람교 개종
말레카 왕국의 왕좌
 정교한 목재 장식의 거주 문화
중앙의 문 너머로 보이는 용머리 선수상


갤러리 C : 식민지 시대(Colonial Era) 

말라카가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된 이래 네덜란드, 영국, 일본 등의 식민지였던 시기의 역사와 문화를 두루 보여주고 있는 전시관이다.


말레이시아의 식민역사

1402년 수리위자야의 한 왕족인 파라메스와라가 세운 말라카 왕국은 지리적 요건으로 해양교역의 중심지가 되어 동서양의 문물과 함께 번성기를 이뤘다. 그러나 1511년 동양에서 향료를 찾던 포르투갈이 희망봉을 돌아 해상으로 가는 길목인 말레카를 중간 거점으로 이용하기 위해 정복했다. 이후, 말레카 왕족들은 지방으로 흩어져 지방 술탄국들을 건설한다. 오늘날 말레이시아가 여러 술탄국 연방이 된 시초이다.

그중 말레카의 술탄 마후무드 샤의 후계자인 알라우딘 1528년  말레이 반도 남단에 조호르 왕국을 건설하였다. 수마트라에 세워진 아체 술탄국과 조호르  두 왕국은 협조하여 포르투갈을 내몰기도 하였지만 세력 확장을 위해 서로 뺏고 뺏기는 경쟁하다가, 이곳에 눈독 들이고 있던 네덜란드를 불러들이는 결과를 초래한다. 1641년 포르투갈령 말라카를 물리친 네덜란드는 세력을 넓 수마트라를 잠식하기 시작한다.

한편 조호르는 아체인에게 뺏긴 권력을 되찾고자 술라웨시 쪽의 부기스 인들을 불러들였고 그 와중에 네덜란드는 인도를 거점으로 확장해오는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조호르를 도와 부기스 인들을 내쫓아 준다.

영국은 1786년 페낭섬에 진출하였고, 싱가포르에는 1819년 요새를 건설하면서 세력을 차츰 넓혀갔다.

이 시기 나폴레옹의 침략으로 세력이 약해진 네덜란드가 말레이시아에 영향력을 갖지 못하자,  태국 시암의 위협을 받은 말레이시아 술탄국들이 영국에게 보호를 요청하는 바람에 영국은 말레이시아 반도 진출 기회를 얻었다.

결국 오랫동안 '영란 전쟁' 중이던 네덜란드와 영국은, 1824년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가,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는 영국의 지배 하에 둔다는 협약을 맺게 된다.

이 당시만 해도 영국은 중국으로 가기 위한 말레이 해안지역 점령이 주목적이었으나, 19세기 주석광산이 발견되면서 18세기 산업혁명으로 천연자원 확보의 필요성이 컸던터라 말레이 반도의 직접적인 통치에 나선다. 그리고 인력을 보충하기 위해 중국인과 인도인들을 대거 말레이로 끌어들다.

19세기에 중국인들이 전란을 피해 말라야에 도래했고, 주석 광산, 철도건설 등에 인적자원으로 투입되는 한편 무역을 하기도 했다. 이들은 점차 상권을 장악하면서 말레이시아에서의 중국인들의 비중은 매우 커져갔다. 또한 1920년대 말라카 개방정책으로 대부분 인도남부로부터의 인도인들(Indians)도 유입되어 주로 영국 농장에서 고무나무 수액채취자들로 고용되었다. 오늘날 말레이시아에서 중국인과 인도인의 인구비중이 큰 이유이다.


1878년 팡코르 조약을 계기로 그동안 독립적이던 말레이의 술탄국들에 영국이 보호국이 되었고 1895년 말레이 연방이 만들어지면서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41년 대동아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동남아 전역을 접수, 지배하였다. 말레이도  2차 대전 패전으로 그들이 물러날 때까지 3년 동안 일본군에게 통치되었다. 기간은 짧았지만 일본군은 잔인했다. 특히 중국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던 일본은 이 지역의 중국인들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이것을 지켜본 말레이인들은 독립의 중요성을 절살히 깨닫게되었다고 한다.

(특히 일본 점령 직후부터 위안소의 개설 시작되었다. 말레카 북서쪽 교외에 있는 건물을 비롯하여 위안소로 이용된 장소들이 아직도 남아있다. 우리나라 정신대 여성들이 얼마나 멀리 끌려갔던지 이미 알려졌지만, 새삼 실감된다.

외조부모님께서 1930년대부터 40년대까지 하얼빈에서 사셨는데 일본군이 만주족들에게 행한 만행을 가끔 말씀하시던 기억이 다. 유태인 못지 않은 잔인한, 차마 옮길수 없는 여러 사례를 들었었다.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독립을 쟁취했으나 영국이 재점령했다. 일본의 만행을 보고 나라독립의 열망을 갖고 있던 말레이인들은 다시 돌아온 영국을 받아들이지 않고 독립을 꾀하다가 1957년 마침내 독립을 이룬다.


이처럼 약 4~500여 년의 식민 기간의  온갖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포르투갈이 타고 온 배를 비롯, 포르투갈이 말라카로 오는 항해 루트 지도, 포르투갈 함대를 재현 한 디오라마,  공격 시 사용되었던 전함 모형 등을 볼수 있다.

현재 말라카에 있는 산티아고 요새는 1511년 말레카를 점령한 포르투갈이 세웠고, 1641년 포르투갈을 쫓아낸  네덜란드가 1670 년에 문을 개조하여 문 아치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로고인 "ANNO 1670"를 새긴다.

이것을 영국이 파괴한 것 중 일부가 조금 남아있는 것을 모형으로 전시하고 있다.

걔 중에는 말레이시아에게 위협적이던 방콕의 시암 왕에게 3년마다 한 번씩 공물로 바쳤던 금으로 만든 꽃도 있다. 금으로 만든 Bunga Emas는 북 말레이시아의 킬 란탄, 테 렝가 누, 파 타니 주의 술탄들이 우정의 상징으로 당시 강력했던 태국 왕에게 보냈다고 한다. 이 태국을 막기 위해 도움을 요청했다가 도리어 그들의 식민 통치를 받게 된 나라가 영국이다.

1890년대 성장한 페낭 항구의 사진과 영국군이 사용한 옛 무기들도 전시되어 있고, 영국이 말레이시아에서 가져간 양대 자원인 고무와 주석, 그리고 고무의 채취 모습 등도 있다.          

일본군인의 모습도 있으며 그들이 사용한 칼도 있다.

각 시대마다 자료가 될만한 것들이 두루 망라되어 있는 것 같다.


왼쪽 :박물관의 산티아고 성벽 모형/오른쪽:  말레카 실제 성벽
왼쪽 : 태국에 조공으로 바친 금꽃/ 오른쪽 : 케다 요새의 아치

       갤러리 D : 말레이시아 오늘

현대 말레이관에서는 1946년 통일 말라야 국가 조직(The United Malay National Organisation, UMNO) 결성 시도, 1948년 말라야 연방 결성, 1957년 말레이시아 독립, 1963년 보르네오 사바와 사라왁을 포함한 말레이시아 연방 수립 등 다사다난했던 현대사와 현재의 말레이시아의 모습을 보여 준다.

1957 년 독립을 이룰 때까지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정치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 의한 민족주의 운동의 초기 역사와 오늘날까지 독립 한 후이 나라가 누렸던 성과를 보여준다.

독립 이후 1963년부터 현재까지 말레이시아 설립 이후의 변화와 발전 과정도 보여준다. 특히 다인종과 다종교를 녹여 통합된 문화를 이루는 가운데 말레이시아 인들은 자신의 관습, 문화 및 신념을 실천하며 이뤄가는 말레이시아를 홍보하기도 한다.

        

야외 전시장의 교통수단들

박물관에서 후원으로 오면 다양한 시기에 사용된 교통수단들이 전시되어 있다.


왼쪽: 증기기관차                       오른쪽:  베카

-T 증기 기관차Small Steam Locomotive : 1929 년에 말레이 주 철도에서 사용하기 위해 강철 화실을 보유한 최초의 영국식 엔진으로 완전히 조립된 상태로 출하되었다.  1964년까지 싱가포르와 Port Swettenham (현재 포트 Kelang)에서 사용되었다.


-베카: 이 삼륜차는 성인 승객 2 명과 어린이 1 ~ 2 명을 태울 수 있다. 조 호르 무라의 패 리트 자와에서 사용되기 시작했고 녹색, 빨간색, 검은색 및 노란색이 당시 선호되던 색상이다. 쿠션은 코코넛 코트로 만들어지며 소품이 장착되어 있다. 지붕은 캔버스로 만들어져 필요에 따라 개폐할 수 있다.

왼쪽: 말라카 말마차,오른쪽: 말라카 불락 카트Melaka Bullock Cart

- 말라카 말 마차 : 1910 년에 멜라 카의 한 중국인이 처음 사용했다. 이후 1955 년까지 승객을 페리로 운송하는 데 사용되었다.


- 멜라 카 불락 카트(Melaka Bullock Cart) : 전통적인 불락 카트는 말라카의 상징으로, 주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5 세기 인도에서 온 무역상들에 의해 소개되었다.  구조는 기본적으로 차체, 바퀴, 차축 및 손잡이의 네 부분으로 나뉜다. 한 쌍의 건강한 황소가 한 시간 반 만에 8km 거리를 끌 수 있었다.

쌀, 장작, 잔디, 가구 등을 운반하기 위해 시골 지역에서 여전히 사용되고, 문화 축제가 열릴 때는 말라카 시 전역에서 아름답게 장식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현재  말레카 잘란 카타 공원에 있는 전시물과 같은 종류인 듯하다.

왼쪽: 오스틴 세븐카, 오른쪽: 증기 기관차 (NO.53101)

- 오스틴 세븐 카: 1933 년에서 1939 년 사이에 허버트 경 오스틴이 디자인했다. 1935년에 제조된 27,280대의 자동차 중 하나이다. 갤런 당 40 마일의 유속 및 시간당 최대 속도 50 마일이었다.


- 증기 기관차 (NO.53101) : 1921년 증기 기관차를 처음 가동해서 1969 년 11월까지 운행했다. 이동 거리는 약 1,250만 마일이다.


옥외 전시관이 더 있었지만 일시적으로 문을 닫은 곳도 있고 장시간 둘러보는 것이 힘들어져서 서쪽 문으로 걸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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