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비가 많이 내린다. 어젯밤, 늦게까지 성안 룩소르 카페에 앉아 밤 정취를 만끽한 우리 세 사람은 예정대로 합숙을 하였다. 거실에 놓인 소파가 엑스트라 베드로 안성맞춤이었다. 사용하지 않고 챙겨둔 대형 목욕타월 2장이 훌륭한 침구커버가 되었다.
모두 기상하자마자 어제 일정이 부담되었는지 서로의 얼굴을 살핀다.
다행히 몸이 마음의 컨디션을 따르는 좋은 예를 남겨준다. 걱정했던 내 무릎이 멀쩡하다.
짧은 만남, 긴 이별이 남아 있어서
그녀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로, 우리는 두브로브니크행 버스를 탈 예정이다.
한국에 돌아가 다시 만나자는 약속으로 아쉬움을 봉합한다.
앞으로 1달 반 더 발칸을여행한단그녀 일정은 많이 남아있지만, 그리스에서 친구와 합류한다는 말에 안심한다.
오랜 기간에 걸친장기 자유여행 다경험자여도, 여행은 예측불허의 상황을 늘 염두에 두어야하기에,남은 일정안전을기원해준다.
비가 많이 와서 오전 일정은 지진 부진하게 날려보냈다.
체크 아웃 시간 맞춰 온 호스트는, 비가 온다고 자신의 차로 우리를 버스 터미널에 데려다주었다.
숙소 이용자 리뷰 점수 9.7 이상 견지 이유가납득된다.
며칠 전 모습 그대로인 버스 터미널, 스플리트 출발점에
나름대로 눈과 마음에 많은 것을 담은 2박 3일 여정을 닫으며 우리는 되돌아왔다.
2번 플랫 홈에서 두브로브니크행 버스에 올라탄다.
오늘도 건너편 항구에는 높다랗게 쌓아 올린 객실을 갖춘 흰색의 거대한 크루즈들이 정박해있다.
언젠가 다시 이곳에 크루즈를 타고 오리란 소망의 씨앗을 뿌리는 새, 버스는 터미널을 빠져나간다.
스플리트 버스 터미널 맞은 편의 훼리 터미널
가는 도중 보스니아 땅 ‘네움'지나기
크로아티아의 아드리아 해안선은 길이가 1,777.3km에 달하고 1,246개에 달하는 크고 작은 섬들로 4,058km에 달하는 해안선에 둘러싸여 있는데, 이는 지중해에서 가장 복잡한 해안선이라고 한다.
그래서 자다르부터, 트로기르, 스플리트, 그리고 두브로브니크로 이어진 달마티안 해안은 변화무쌍하게 여러 풍경을 보여준다.
해발고도 1m자다르처럼 거의해수면 높이의 나지막한 해안 풍광을 보여주는가 하면 산악지대 가파른 절벽길을 달리기도 한다.
저지대에서 만나는 마을은 버스길 옆 주택의 대문이 코 앞이고,
집 옆의 투명한 바닷물은 버스에서 내려선다면 바로 발목을 적실수 있을 정도로 가깝다.
머리를 들면 망망대해 아드리아의 수평선이 들어오고,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면 버스 바퀴 근처쯤의 바닷물을 보게 되니 버스가 마치 해변 가장자리, 얕은 바다를 주행하는 듯 착시감을 준다.
그러다가
버스는 어느새 산 중턱으로 오르기 시작한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의 국경 가까이에 있는 디나르 알프스 산맥의 일부인 디나라산과 어제 갔던 오미스 바위산의 주산인 비오코보 산맥 등이 가파르게 바다로 쓸려내려간 지형의 해안선에서버스길은카르스트 높은 바위산중턱을 깍아 만든 낭떠러지 위로 이어진다.
이번엔 아득히 내려다보이는 아드리아해로 인해 버스가 붕 뜬듯한 느낌이 든다.
버스 차창에 펼쳐진 다양한 풍광 보는 재미가 배가된다.
커브 돌 때마다 바다와 마을이 술래잡기처럼 번갈아 나타나기도 하고
푸른 하늘, 푸른 바다에 포구 가득 정박되어 있는 흰색 요트들 색감 대비도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풍광이 된다.
그새 날씨는 개어있다.
근거리의 투명한 바닷물과
산 중턱에서 간간히 떠있는 섬을 감돌며 아득히 멀어지는 아드리아해의 수평선을 보며 내쳐 해안을 달리다 보니, 불현듯 내 나라 경북 영덕군의 축산항 인근 도로의 30년 전 모습이 되살아난다.
1980년대 동해안의 강구항과 축산항 간 비포장 해안도로!(현재는 20번 도로)
바닷가에 솟은 높다란 바위에 연결된 능선위로
바다쪽에 바짝 붙어나있는 해안도로였다.
영덕 출발 지역버스는 그렇게 강구항을 지나 축산으로 가는 내내 지금도 잊히지 않는 풍경을 내게 남겨주었다.
굽이 돌 때마다 바위를 때리며 흰 이를 드러내는 시리게 푸른 동해의 청량한 물결.
동해가 버스를 따라오며 버스 한면 가득히 wide vision으로 망망대해를 펼쳐보였다.
더하여 그 버스 차장은 마을마다 올라타는 주민들 짐을 저 멀리까지 달려 나가 옮겨 받아와 버스에 싣기를 반복했다. 심지어는 화장실 급한 손님의 용무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는 맞춤형 버스였다고 하면 요새 사람들은 믿어나 줄건지!
조바심 내지 않고 느긋하게 타인의 입장을 배려하며 기다리고 품어주던 시절이 그리 멀지 않은 과거였음을 알리고 싶다.
해수면과 비슷한 높이의 도로변 주택들
낮은 고도 해안길을 달리는 버스
해안가 주택들
버스에서 내리면 금방 바닷물에 적셔질 듯 가까운 도로
점차 위로 오르기 시작하는 버스
투명한 아드리아해
크로아티아를 두 토막으로 나눈 '네움'을 지나다.
스플리트에서 오후 2시 35분 출발했던 버스는 6시 45분 도착 예정이다.
두브로브니크와는 약 230km 떨어져 있고 중간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도시 '네움'을 경유하게 된다. 이 곳 역시 크로아티아인이 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함에도 엄연히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영토이다.
이유는, 1699년 카를로비치 조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라구나 공화국'이었던 두브로브니크와 1699년 카를로비치 조약
여행 초기 지나온 로빈과 풀라가 있던 이스트라 반도가 로마제국 이후 천년경부터 일찌감치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향권에 있었으며 이후 같은 달마티아 지방이지만 자다르 스플리트 또한 점차 베네치아의 지배 하에 있었던 것과는 달리 두브로브니크는 자체적으로 공화국을 유지하고 있었다.
학계에서는 많은 항구와 주변 섬의 해안이 있는 훌륭한 지리적 여건으로 그리스 시대부터 아드리아 해안을 따라 두브로브니크가 식민지로 건설됐을 것으로 추정한다.그리하여 7세기 이래, 해상무역도시국가로 성장한 라구사 공화국은13세기부터 약 600년 간 아드리아 해의 무역과 제해권(制海權)을 놓고 베네치아와 경쟁했다.
두 도시 국가는 상업에 밝고 해군력 강한 상무(商武) 국가, 그리고 공화국이었던 공통점이 있다.
라구사는 특히 16세기 말엔 보유 선박 규모가 유럽의 유수한 해양강국 베니스와 거의 맞먹었고 세계 도처에서 무역으로 국익(國益)을 신장시켰다.
그러나 1667년 4월 6일부터 8일 동안 계속된 대지진으로 폐허가 되었고 약 8000 명의 시민 중 5000명이 죽을 정도로 타격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재건으로 국력이 쇠약해졌다.
마침내 1699년, 점차 이스트라 반도로부터 남하하여 달마티안 내부까지 식민 지역을 넓혀오던 베네치아 지배권과 離隔(이격) 하기 위하여 라구사는 주변 영토 일부를 오스만 터키에게 넘긴다. 그곳이 바로 네움이다.
이후 1차 세계대전이 독일, 오스트리아 제국의 패배로 끝나자 두브로브니크가 속한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세르비아는 유고 왕국으로 연합, 독립하였다.
이때 라구사 공화국에서 두브로브니크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시절까지는 크로아티아나 보스니아나 서로 다른 행정구역일 뿐이었기에 네움이 보스니아 영토라고 하더라도 크로아티아 본토와 두브로브니크를 오가는 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가분열되면서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는 독립하여 다른 나라가 되었다.
이로 인해 보스니아 영토가 된 네움으로 크로아티아 영토는 단절되었다.
오늘 두브로브니크로 가면서 국경을 두 번 넘는 원인이다.
크로아티아는 역사적·지리적으로 네움 지역이 보스니아보다 크로아티아와 더 가깝다며 반환을 요구하지만 보스니아는 거부한다.
그도 그럴것이 네움으로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아드리아해 21km 해안을 가지게 되어 내륙국을 면하게 되었고 국가경제에 심각한 악영향을 피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끊어진 육로 대신 해상으로 스플리트와 두브로브니크 간 약 5시간 이동한다.
국경을 넘어 네움에 이르러 모두 버스에서 내려 인근에 있는 면세점을 들렀다. 단체 관광객 일본인들이 초콜릿과 와인 등 물건을 가득가득 사서 버스에 싣고 떠난다.
마치 중국인들이 일본 면세점에서 물건을 쓸어가는 모습과 비슷하다. 우리도 잠시 내려 몇 가지 물건들을 샀다. 다시 버스에 올라 검문소를 통과하고 두브로브니크를 향해 달린다.
마침내 두부로르니크
여전히 아름답기 만한 풍광은 마침내 두브로브니크의 입구 격인 Franjo Tudjman Bridge 위를 달린다.
멀리서도 잘 보이는 이 다리는 1998년 시작해서 2002 년 5 월 21 일에 공식적으로 개통되었고 당시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518m 길이의 이 다리 건설로 내해로 휘어진 해안가 10km 정도를 도는 시간, 15분여를 단축한다.
이 다리는 두부르보니크 입성 자와 되돌아 나가는 자 모두를 위한 인사의 이정표가 됨직하다.
산 중턱에서 막힘없이 툭 트인 아드리아해를 옆에 두고 달리던 버스는 언뜻 성벽을 만나는가 싶더니 이내 커브를 돌아 시가지 도로로 내려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