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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온 시간들 Oct 25. 2022

어떤 선택이 최선일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을 하게 된다. 그 선택에 앞서 많은 생각을 하기 마련이며,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혹은 어쩔 수 없이 한 가지를 택하곤 한다. 그러한 우리의 선택은 정말 최선인 것일까? 서영은의 단편 소설 <묘수>는 삶에 있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선택을 하는 것이 최선일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다 무익하고 부질없으니 놓아라, 놓아라, 하는데도 놓지 못하고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울음을 삼킨 유일한 것은 사랑,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사랑 그것만큼 부질없는 것이 또 있을까…. 사랑이란 타인 안에서 내가 죽는 것, 그 잔인한 역설과 오랜 세월 진저리 나게 겨루어 왔음에도 나는 상처투성이인 채 아직 살아 있다. 나의 이 살아 있음은, 죽음이 있어 부질없고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 죽음 때문에 불멸로 반전되리라고 믿는다면, 사람들은 알 수 있을까. 그래서 그 나귀가 내 가슴에 얼굴을 부빌 때 나는 알았노라고, 하나님의 사자임이 틀림없다는 확신은 홀연히 나타난 나귀의 신비로운 몸짓 때문이 아니라, 내가 살아온 전 생애, 생의 허무한 궁극, 역설과 끈질기게 대면하며 품게 된 비통한 갈망이 가르쳐 준 것이라고 한다면 답이 될까.”


  사랑도 어쩌면 하나의 선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만이 아닌 타인과의 관계에 따른 그 선택은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는 것일까? 사랑이란 진정 타인 안에서 내가 죽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왜 그러한 선택을 하는 것일까? 


  오래도록 겨루는 것을 피하는 사람은 진정한 사랑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많은 경우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기에 소중했던 그 사랑마저 끊기도 한다. 또한, 자기 편한 대로 살기 위해 애써 선택한 그 사랑을 배신하기도 한다. 


  사랑은 불멸이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버려야 한다. 스스로를 내세우는 한 참된 사랑은 존재하기 힘들다. 사랑은 선택으로 시작할지 모르나 그 지속은 선택만으로는 감당하기에 충분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순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일상의 삶에서 믿음에 뿌리를 둔 소소한 결단을 이어갔다. 사업을 한다고 큰돈을 빌려가서 삼 년 만에 파산한 조카를 빚쟁이의 굴레에서 풀어 주었고, 값나가는 보석류나 그림들을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내 삶의 여전한 의미일 수 있는 부부의 인연에도 더 이상 연연하지 않았고, 도움을 구하는 손길이 있으면 그것이 금전이라 할지라도 거절하지 않고 과감히 손을 폈다. 높임을 받는 자리에는 나서지 않으려 애썼고, 바깥의 일들도 최소한의 생활비를 충당할 만하면 더 이상 받지 않았다.”


  그녀가 산티아고 순례를 다녀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산티아고 순례 후 그녀의 삶은 어떻게 바뀐 것일까? 더 이상 최선의 선택을 기대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인생에서 묘수라는 것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일까?


  최선이라고 해서 선택한 것이 최선이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선택하는 이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고, 우리의 삶 자체가 불확실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의 선택이 최선이 아닐 수 있다는 마음, 그것이 최선의 선택을 하려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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