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위에 아픔이나 상처가 없는 사람은 있을까? 살아가는 것이 힘든 이유는 이겨내기 힘든 그러한 것들로 인함이 아닐까 싶다. 손영목의 <여섯 장면의 짧고 슬픈 드라마>는 자폐 자녀를 둔 한 부부의 가슴 시린 단편 소설이다.
“다행히도 저만치 고궁 담벼락을 끼고 조성되어 있는 간이 공원이 시야에 들어온다. 윤주를 데리고 그곳으로 가서 벤치에 털썩 앉는다. 시끄럽고 분주한 도시의 한가운데서 혼자 외돌토리로 떨어져 앉은 이 삭막함과 처량함, 영락없는 열패자의 꼬락서니다. 저 많은 사람들의 눈에 내가 그렇게 비치겠지. 무슨 상관이람. 너희들이 날 밥 먹여주느냐고. 내 슬픔과 고통과 눈물이 너희들한테 무슨 상관이야. 관심이나 있어? 그렇게 생각하니 저절로 목이 메며 눈앞이 흐려진다. 눈을 꼭 감았다가 뜬다. 떨어지는 눈물방울이 뺨을 간질인다.”
나의 아픔을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상 사람은 각자 자신의 삶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감당하기 힘든 고통과 어려움도 온전히 내가 감당해야만 한다.
자폐아 언어장애를 가진 어린 딸을 매일 대할 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속상하고 힘들까? 그것은 직접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이해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그러한 슬픔과 고통을 어디까지 감내할 수 있는 것일까?
“윤주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이 맑고 예쁜 눈이, 눈의 표정이, 이 아이의 경우는 자폐증의 증거란 말인가. 아냐, 그렇지 않아. 밉살스러운 것들. 대상이 분명하지 않은 분노와 적의가 뱃속에서 슬며시 고개를 쳐든다. 나는, 우리 가족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윤주는 내 앞에 가만히 서 있다. 끌어다 옆자리에 앉힌다.”
삶은 원하지 않는 것들이 어느 순간 우리에게 다가온다. 내가 바라지 않았던 것들이,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일들이 나의 주위를 압박하며 어서 무너져내리라고 명령한다. 모든 것을 포기하라고, 어서 무릎을 꿇으라고, 나를 찍어누르고 있다.
왜 이러한 일들이 나에게 다가온 것일까?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길래 이러한 일들이 나에게 오는 것일까?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조차 그렇게 힘든 것일까?
“생각해 봐, 윤주의 말문이 열린 게, 이게 보통 기적이야? 당신과 나의 간절한 기원이 운명의 신을 감동시킨 거라고. 그러나 기적은 한 번으로 족해. 더 이상의 것을 바라면 우리가 나쁜 인간이 되고, 한 번의 기적도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말지 몰라. 아니, 틀림없다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삶에는 아픔과 고통이 있기 마련이지만, 가끔은 삶이 우리에게 기적을 선물하기도 한다. 전혀 생각하거나 상상하지 않았던 일들이 우리에게 불쑥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 기적이 일어났을 때 왜 이제 나타났냐고, 좀 더 일찍 나타나지 왜 그리 늦게 온거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순간이,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 기대가 이루어지는 순간이, 눈물이 날 정도로 기쁜 순간이 우리 삶의 어느 지점에서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우리의 삶에는 분명히 믿지 못할 그러한 날들이 언젠가 분명히 찾아오리라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