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잠시 쉬어도 됩니다

by 지나온 시간들

춘천 마라톤 구간에는 20개 정도의 오르막이 있었습니다. 가장 힘든 구간은 출발선에서 약 28km 정도 지난 곳이었습니다. 경사가 급하지는 않았지만, 2~3km가 계속 오르막이었습니다. 출발하고 20km가 지나자 곳곳에서 다리에 쥐가 나 길바닥에 누워버리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28km 오르막 구간에는 수십 명의 사람이 쥐가 난 다리를 응급처치하느라 난리였습니다. 구급차가 다니면서 그중 심한 사람들을 태우고 병원으로 향하기도 하였습니다. 응급 구조원들이 달려와 여기저기 도와주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습니다.


저 또한 반환점인 21km 정도까지는 괜찮았지만, 25km가 지나면서 점점 다리가 무거워지기 시작했고 체력도 점점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목표로 했던 시간대에서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고 이제는 출발했을 때 마음속에 생각했던 그 시간 안에 들어갈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목표로 했던 것을 이루기 위해 다시 힘을 내서 달려 보았지만, 저의 한계를 느낄 뿐이었습니다. 더 이상 무리하게 되면 저 또한 완주는커녕 바닥에 누워 쥐 난 다리를 응급처치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는 목표를 쉽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든 이루어보려고 모든 것을 쏟아부어 치열하게 노력했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그 목표라는 것이 그리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생각했던 그것을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경우에는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로 변해버리기도 하고, 그 목표가 엄청나게 나에게 좋은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처음에 생각했던 것을 이루고 나면 성취감이나 보람 같은 것을 느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크게 봐서는 목표를 이루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삶에 있어서 커다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의 구간이라는 28km를 지나 잠시 달려온 길을 돌아보니 뒤로 유연하게 내리뻗은 그 오르막길이 보였습니다. 내가 달려온 길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생각보다 긴 오르막이었습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마라톤에서는 내리막길이라고 해서 무작정 빨리 달려 나가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더 부상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르막을 올라오느라 써버린 에너지로 인해 다리가 쉽게 풀려 내리막길에서 크게 넘어지는 경우도 많이 발생하곤 합니다. 내리막길이기에 그동안 잃어버린 시간을 단축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욕심을 버리고 오르막길보다 조금만 더 빨리 달렸습니다.


30km를 눈앞에 두고 점점 다리가 둔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더 무리하면 끝까지 완주할 수가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을 내려놓고 30km에서 조금 쉬었다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30km 지점에서 제공해 주는 물을 마시고, 간식도 챙겨 천천히 걸어가면서 먹었습니다. 그 이전 구간에서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뛰어가면서 물과 간식을 먹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500mL 식수를 가지고 잠깐 서서 얼굴과 손을 씻었습니다. 땀으로 젖은 얼굴을 닦고 안경도 닦고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마음의 여유를 찾으려 노력하였습니다. 아마 500m 정도를 그렇게 걸으면서 갔던 것 같습니다. 당연히 시간은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그렇게 잠깐 쉬고 났더니 어디선가 나도 모르는 기운이 조금씩 생기는 것 같았습니다. 지친 몸으로 인해 앞도 잘 보이지 않았는데 자고 일어난 것처럼 눈이 다시 떠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기록을 내고 싶기는 했지만, 그것을 이루려다가 더 중요한 것을 잃을 것 같았습니다. 마음이 편해짐을 느꼈습니다. 비록 시간은 조금 늦어질지 모르지만, 끝까지 달릴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런 마음이 들자 무거웠던 다리가 그리 부담되지 않았습니다. 비록 지친 다리지만, 끝까지 달리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42.195km를 완주했습니다.


잠시 쉬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비록 500m를 잃어버리기는 했지만, 나머지 거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쉬었다 가도 됩니다. 오늘 하루가 힘들면, 마음이 무거우면, 감당이 안 되면, 누군가가 미우면, 원하는 것이 잘 안 되면, 계획에 차질이 있어도, 쉬었다 가더라도 그리 큰 차이가 없습니다.


잠시 쉬었다 가는 것이 오히려 나머지 것을 잃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다람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