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소설에 나타나는 삶의 단면

by 지나온 시간들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어서 내가 생각하는 대로 말이나 행동을 할 수 없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내가 원하는 삶이 있지만, 나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나의 삶이 내가 의도하는 대로 살아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한강의 소설 <왼손>은 어느 날 갑자기 주인공의 왼손이 조절이 불가능하게 되자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틀고 찬물로 거품을 씻어내는 동안 그는 처음으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의 왼손이 상처 난 곳을 어루만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왼손의 감각을 뺨을 느꼈고, 동시에 뺨의 감각을 왼손으로 느꼈다. 평소와 똑같은 정상적인 감각이었다. 이상한 것은 그의 왼손이 마치 나름의 의지를 가진 것처럼 뺨의 상처 주변을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

내면의 또 다른 나는 내가 하고 싶지 않은 말을, 해서는 안 되는 말을 다른 이에게 쏟아내기도 한다. 나의 또 다른 나는 마음속으로는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행동을 하게 되기도 한다. 그로 인해 나의 진심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다른 이들은 오로지 현상적인 것에 의해 나를 판단하고 나를 대하게 될 수밖에 없다.

“모든 게 이 손 때문이야. 그는 자신의 왼손을 움켜잡으며 말했다. 그녀의 얼굴로 되돌아가려는 것인지, 그의 왼손은 몸을 뒤틀며 오른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애쓰고 있었다. 왼손이 말을 듣지 않아. 이것 때문에 다 엉망이 됐어. 직장도 잘렸어. 이게 아니었으면, 그날 여기로 들어오지도 않았을 거고.”

내면의 또 다른 나에 의해 내 삶의 주인이 바뀔 수도 있다. 진정한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나의 삶을 바꿔버리고 만다. 통제 불가능한 삶이 또 다른 나에 의해 나를 억압하고 만다.

“그는 오른손을 뻗으면 바로 닿도록 칼을 두고 망치를 집었다. 눈을 빛내며 망치를 치켜올렸다. 벼락같이 왼손이 따라 올라와 망치를 잡아챘다. 이번에는 그의 오른손이 왼 손목을 비틀었다. 망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왼 손목이 통증에 그의 미간이 조여졌다. 경고했지, 널 죽여버리겠어! 그의 오른손이 과도를 움켜쥐었다. 순간 뱀처럼 솟구쳐 오른 왼손이 오른 손목을 거머쥐었다. 놔, 이거 놔. 그의 얼굴 근육들이 뒤틀렸다. 이마의 핏줄들이 꿈틀대며 일어섰다.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오른 손목이 돌연 부러지듯 뒤로 꺾였다. 왼손이 과도를 낚아챘다.”

내면의 또 다른 나는 나의 삶을 파괴해 버릴지도 모른다. 내 주위의 사람들을 모두 떠나가게 만들지도 모른다. 진정한 나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게 할지도 모른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나는 나 자신을 내가 생각하는 대로 살아가게 하고 있는 것일까?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생각지도 못한 사건으로, 나의 내면에 없었던 말로, 나의 뜻과 상관없는 행동으로 나는 나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진정한 나의 주인으로서 나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어떤 것일까? 나는 얼마나 나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일까? 내 안에는 얼마나 또 다른 내가 존재하고 있는지, 진정한 나는 누구인지, 참나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일까?

사랑이었지만, 분명히 마음속에 가득히 존재했었지만, 어느 순간 그 사랑은 떠나가 버리고,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기에, 그토록 소중히 오래도록 남아 있는 것일까?

한강의 <파란 돌>은 순수했던 시절, 마음 가득히 다가온 사랑을 허무하게 잃어버린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가장 소중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내 이름을 부를 때 당신의 목소리는 언제나 낮고 부드러웠지요. 실은, 일부러 못 들은 척해 두 번 부르게 한 적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그 목소리에 처음 가슴이 두근거린 게 언제인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처음 당신을 사랑하게 된 것이 언제인지도 구별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부터 당신의 얼굴이 내 눈앞 어딘가에 어렴풋한 그림자처럼 자리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이미 모든 사물 위로 아련히 어려 있고, 놀라 눈을 감으면 어두운 눈꺼풀 위로 더욱 선명해졌습니다. 그 느낌이 강한 슬픔과 닮아 있는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 채, 갑자기 다가왔던 사랑이었다. 마음 한가득, 모든 것을 꽉 채워버린 운명 같은 사랑이었다. 그런 사랑이 두려운 것은 무엇 때문인 것일까?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인 걸까? 왠지 그 사랑이 더욱 슬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슨 연유인 것일까?

“왜 그 순간 선명하게 떠올랐던 걸까요. 작업실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는, 오직 상상 속에서만 보았던 당신의 뒷모습이. 긴 듯하던 머리칼과 좁은 어깨, 늘 먹 자국이 번져 있던 낡은 면바지가. 당신의 뒤통수에 피가 고여 있었다고, 5천이 채 되지 않는 혈소판 수치 때문에 피를 뽑아내는 시술도 받지 못했다고, 사흘 만에 학교에 나타난 친구는 입술을 물었었습니다. 그래서, 라고 나는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정말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너 바보야? 뒤통수에 피가 고여 있었대. 작은 우유팩 하나만큼 고여 있었다구. 내가 저녁 먹으라고 부르러 갔을 때 이미. 친구의 충혈된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나는 멍하게 지켜 보았습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계속 될 것이라 생각했었다. 이토록 허무하게 떠나가 버릴 줄은 몰랐다. 함께 한 시간도, 같이 했던 일들도 그리 많지 않았는데, 추억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들도 별로 없었는데, 너는 왜 그리도 일찍 떠나가 버린 것일까? 남아 있는 나는 어떻게 하라고, 어떻게 살아가라고, 아무런 말도 없이 그렇게 혼자서 가버리고 말았던 것인가?

“그렇게 몸서리치며 깨고 나면 아이의 이불을 덮어주고, 덩어리져 스멀거리는 어둠의 틈과 마디들을 헤아리며 잠을 청합니다. 그러다 가끔은 당신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문밖으로 빗소리가 추적추적 들려오던 그 오후, 두려워하는 두 입술이 만나던 순간을. 두 사람 모두 입술을 벌리지도 못한 채, 서로의 부드러움이 떠날 것이 두려워 뛰는 심장들을 맞붙이고 있었지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그 입맞춤 이후, 나는 어떤 남자에게서도 더 이상의 기쁨을 얻지 못했습니다. 어떤 흥분과도, 무아경의 희열과도 바꿀 수 없을 겁니다. 나이만 먹은 소년이었던 당신의 겁먹은 손이 숨죽이며 내 뺨에 머물렀던 순간을.”

너는 아직 내 마음속에 남아 있지만,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고, 너무나도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나의 모습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그래서 새로운 시간을 시작했는데 그것은 아마 착각이었는지 모른다. 나에게 가장 소중했던 너를 무엇이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시간이란 흐르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그때 함께 찾아옵니다. 그러니까, 그 시간으로 돌아가면 그 시간의 당신과 내가 빗소리를 듣고 있다구요. 당신은 어디로도 간 게 아니라구요. 사라지지도, 떠나지도 않았다구요. 언젠가부터, 당신과 동갑인 남자를 만날 때마다 세월이 변화시켰을 당신의 얼굴을 막막하게 그려보던 버릇을 버린 것은 그 때문입니다.”

떠난 줄 알았는데 떠난 게 아니었다. 잊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잊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순간순간, 퍼뜩퍼뜩, 다가오는 너의 모습이 나의 어찌할 수 없는 마음으로 아직도 너를 그리워한다.

이제 너를 잊어버릴 수 있을 것이란 마음을 접으려 한다. 생각나면 생각나는 대로, 그리우면 그리운 대로 그렇게 살아가려고 한다.

우리에게 있어 무엇보다도 가장 소중한 것은 인간 그 자체가 아닐까 싶어. 하지만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는 극히 약하고 힘에 부치는 존재인지도 몰라. 어떤 단체에서 하나의 부속품인 것처럼 그저 적응하고 변화되고 맞춰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되는 것 또한 사실이야.

오늘은 한강의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인간이라는 소중한 존재에 비해, 한 명의 개인의 힘이 얼마나 미약한지 느끼게 해준다.

“그는 회사에 뼈를 묻지 않았다. 내가 글을 쓰겠다고 이 년여 만에 회사를 그만둔 이듬해, 그가 경주 언니보다 먼저 이직을 했다. 경력직 공채에 들어간 시사잡지 편집부에서 오 년쯤 일하다가, 한 대기업에 대해 비판적인 특집기사가 인쇄 직전 삭제되는 일이 벌어졌다. 항의를 위한 태업과 파업, 주동자 해고의 수순을 밟은 뒤 기자들은 끝까지 싸우자는 이들과 업무 복귀하자는 이들로 분열되었다. 그는 돌아가지 않는 편을 택했다.”

생존을 위해 어느 한 단체에 의지할 수밖에 없기에, 자신의 생각과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이다. 커다란 세력에 저항하고 싶지만, 그 한계는 너무나 분명히 존재하기에 어느 정도까지 하다가 지쳐 스스로 그만 포기하게 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서울내기들보다 더 서울내기같이 좀처럼 흥분하지 않던 사람. 새벽까지 다들 술에 취해 울분을 토하는데 술집 화분에서 풀잎을 꺾어 피리를 불어보다 얼른 내려놓던, 사실은 촌놈. 암 진단을 받은 즈음이었을 여름에 그가 지나가듯 말했다. ‘이제 너무 착하게 살지 말아야겠어. 착한 사람은 일찍 죽는 것 같아.’ 왜 그때 나는 그토록 야무지게 되받아쳤던가? 당신, 별로 안 착하거든.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 테니 걱정 마.”

울분을 토해내고 싶어도 참아야 하고, 부당한 것을 지적하고 싶어도 침묵해야 하고, 억울한 것이 있어도 감추어야만 하는 한 개인의 삶은 소중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그저 한 송이 눈처럼 약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함께 있어 주세요, 소녀가 말한다. 젊은 승려가 멀찍이 떨어져 서서 대답한다. 그건 안 된단다. 제발,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만. 소녀는 나무 욕조의 물속에 들어가 있는데, 이상하게도 그녀의 머리에 쌓인 눈이 녹지 않는다. 그 눈송이들을 커다랗게 확대한, 눈의 결정 모양을 한 빛 무늬가 무대 뒤편 검은 벽에 하얗게 비쳐 있다. 그 결정들을 홀린 듯 바라보며 승려가 묻는다. 왜 머리 위 눈이 녹지 않을까? 시간이 흐르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우리가 시간 밖에 있으니까요.”

우리는 한 송이 눈처럼 언제 녹을지 모르는 그런 존재라는 생각에 공감하고 있다. 그 미약한 눈 한 송이가 언제 사라질지도 모르는 시공간에 살아가고 있으니 그 누가 함께라도 있어 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 시간이 비록 짧을지라도 누군가가 옆에 같이 있어 준다면 정말 힘이 될 텐데 현실을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다른 시공간에서 존재한다면, 지금의 여기를 떠나 다른 그곳으로 간다면 가능한 걸까? 내가 있어야 할 곳이, 나의 눈 한 송이가 녹지 않을 수 있는 시간이나 공간은,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인 걸까?

눈 한 송이는 자세히 보면 너무 아름답고 소중한 존재임이 분명하지만,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모르니 그 현실을 알고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는 어쩌면 슬픈 운명을 타고난 것일 수도 있다.

우리의 삶은 어느 순간 모든 것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영원히 나의 곁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우리에게 내일이라는 시간은 보장되어 있지 않다. 한강의 <밝아지기 전에>는 우리에게 있어 존재하고 있는 그 어떤 것이 생각하지도 않은 일로 갑자기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고 있는 소설이다.

“부질없는 심문과 대답 사이, 체념과 환멸과 적의를 담아, 서늘하게 서로의 얼굴을 응시하는 시간.

눈이 흔들리고 입술이 떨리는 시간.

내 죽음 속으로 그가 결코 들어올 수 없고, 내가 그의 생명 속으로 결코 들어갈 수 없는 시간.

그 모든 것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 시간.

오직 삶을, 삶만을 달라고, 누구에게든, 무엇에게든 기어가 구걸하고 싶었던 시간.

그 시간들이 충분히 멀어지지 않았다. 모래톱 저쪽의 바다처럼, 아직 지척에서 일렁이며 소리를 낸다. 짠물이 덜 마른 흙 같은 몸이 아직 모든 걸 똑똑히 기억한다.”

모든 시간들이 그렇게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내 곁에 계속해서 머무를 것 같았던 시간들이 그렇게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믿어지지 않지만, 나의 시간도 언젠가는 끝나기 마련이다. 우리는 왜 그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잊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많은 것들이 사라져 버리는 시간이 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우리는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에게 말해보고 싶었다. 새벽까지 타는 심장을 그녀가 지켜보았던 그해. 생각 속의 미로 속에서 더듬더듬 내가 움켜쥐려 한 생각들을. 시간이 정말 주어진다면 다르게 살겠다고. 망치로 머리를 맞은 짐승처럼 죽지 않도록, 다음번엔 두려워하지 않을 준비를 하겠다고. 내 안에 있는 가장 뜨겁고 진실하고 명징한 것, 그것만 꺼내놓겠다고. 무섭도록 무정한 세계, 언제든 무심코 나를 버릴 수 있는 삶을 향해서.”

우리에게 시간이 다시 주어질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시간이 주어지면 우리는 다르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것도 모를 일이다. 수많은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졌지만, 그것을 너무 쉽게 놓치고 말았다. 다시 오지 않을 기회와 시간들이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리기 전에,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놓치기 전에, 소중한 것들이 나에게서 멀어져 버리기 전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없기 전에,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없기 전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순간들이 지나가기 전에, 우리는 그 순간들을 소중히 살아가야만 하지 않을까?

삶은 수많은 사건들의 집합이다. 그중 어떤 사건은 우리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기도 한다. 그로 인해 사람은 변하고, 사랑도 변하며 인간관계도 변한다.

우리의 삶에 재생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힘들었던 인간관계도 쉽게 회복할 수 있고, 무관심으로 변해가는 사랑도 회복될 수 있다면 삶이 좀 더 쉬워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치 도마뱀이나 도롱뇽의 재생력처럼. 한강의 <노랑무늬영원>은 재생되지 않는 우리 삶에 대한 아픔을 이야기하고 있는 소설이다.

“난 언제나 그렇게,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감당해내려 하는 어리석음이 단점이었어. 순간적인 판단력도 부족했어. 항시 냉철하여, 때로는 잔인할 수도 있어야 하는데. 교훈이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지 나는 그때 알았다. 인생은 학교가 아니다. 반복되는 시험도 아니다. 내 왼손은 으스러져 버렸고, 그게 끝이었다. 배울 것도 반성할 것도 없었다. 어떤 의미도 없었다.”

인생은 한 번뿐이다. 우리의 모든 것들은 단지 한 번밖에 없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은 과거가 될 뿐이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냥 다 지나가 버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인생에 있어 연습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깨를 결려가며, 손가락에 상처를 내가며 두 손, 두 팔로 이것들을 다룰 수 있었을 때, 며칠 밤을 새워 작업에 몰입할 수 있었을 때 나는 행복했다. 그 행복만이 내가 가진 전부였다. 전부라고 믿었던 것을 잃고도 살아갈 수 있다. 이 년 동안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환자. 한 남자의 골칫덩어리. 때로 오른손이 악화되면 자신이 쓴 물컵 하나 선반에 뒤집어놓을 수 없는, 철저히 쓸모없는 존재.”

자신이 절대적으로 생각하던 것을 잃어버렸을 때, 삶은 허무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원래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을 잃어도 살아갈 수 있다. 이 세상에 처음 올 때 나는 아무것도 없었고, 이 세상을 떠날 때도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고 떠난다. 내 삶의 가장 소중한 것도 사실 나의 것이 아니다.

“한번 불이 켜지고 나자, 예전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이상한 강을 – 그때까지 한 번도 건너본 적 없는 – 건넌 것이다. 그 연극 속에서 울고 웃고 마음 졸였던 나는 이미 내가 아니었다. 예전에 미워했던 것들을 더 이상 미워할 수 없었으며, 그보다 나쁜 것은 예전에 사랑했던 사람들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남편도, 형제들도, 심지어 어머니까지도.”

한번 지나간 것은 돌이키기 힘들다. 사랑도, 믿음도, 사람들 간의 관계도, 지나가 버리고 나면 다시 예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강을 건너버리면 다시 원래의 위치로 가기에 힘든 것이 우리 삶이 아닐까?

“집으로 가자. 그러나 어떤 딱딱한 덩어리가 가슴 가운데에서 느껴진다. 그곳이 내 집이 아니다. 나에게는 집이 없다. 이 삶은 나의 삶이 아니다. 어떤 정서적 유대도 느낄 수 없다. 어떤 장소, 어떤 기억, 어떤 미래에 대해서도. 뙤약볕을 간신히 가려주는 중간 키의 나무 아래에서 나는 오래 좌석버스를 기다린다. 내 얼굴에 흐르는 땀, 쇠약해진 다리의 비척거리는 느낌, 늘어뜨려진 두 손 – 몸의 작은 감각 하나하나에 집중한다. 나는 살아 있다. 이 순간 나는 살아 있다. 보고 듣고 숨 쉰다. 분명한 것은 그것뿐이다. 그것만이 나에게 남았다.”

가장 편안한 곳은 내가 살던 집이었지만, 그 안의 구성원들이 변하고, 구성원 간의 관계가 변하면, 그 집은 더 이상 예전의 나의 집이 아니다. 그곳에서 쉴 수도 없고, 마음 편하게 지낼 수도 없다. 그동안 마음 편했던 집도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모든 상황에는 조건이 있다. 우리의 평화는 내 건강을 전제한 것이었다. 조건이 달라지면 상황이 달라진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만일 내가 그 사고로 죽었다면 우리의 다정함이 더럽혀지지 않았을 테지만, 나는 살아남았다. 나는 지겹도록 아팠고, 내가 지겨운 만큼 그도 지겨워했다. 나를 지겨워하는 그가 나도 지겨웠다. 서로의 얼굴이 지겨워서 종종, 암묵적으로 서로의 눈길을 피했다. 그 과정에는 어떤 부도덕도, 죄악도 없었다. 당연한 일일뿐이었다. 나도 예전의 내가 아니며, 그도 그때의 그가 아닌 것뿐이었다. 모든 것이 지나가 버렸을 따름이었다. 외딴섬에 단둘이 표류된 사람들처럼, 우리는 서서히 서로를 질식시켰다. 그렇게 다시 건널 수 없는 강을 만들어 갔다. 서로에 대한 배려, 이타적 관계, 우정, 동료 의식 들은 강 저편에 남았다. 애초에 완전한 타인이었다는 것 – 그 한 가지 명료한 사실만이 이편의 강가에 남았다.”

모든 것은 변해간다. 변하지 않을 것이라 믿는 것 자체가 오산이다. 사랑도 변하고, 사람도 변한다. 그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 더 이상 아름다운 것들은 존재하기 힘들다. 사람 간의 관계도 변할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이 변했다고 탓할 필요도 없다. 자신 또한 그 사람만큼이나 변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자신만 모르고 있을 뿐이다.

“저 사람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심성이 여리고 다정했었다. 그러나 닳아간다. 타이어가 닳는 것처럼, 이런저런 일들을 몸으로 겪으면서. 그와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그렇게 조금씩, 닳아간다는 것을 의식 못 하면서 조금씩, 바퀴가 미끄러워진다. 미끄러워지고, 미끄러워져서,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브레이크가 듣지 않는다.”

노력하지 않는 한 변하는 사랑은 지나가기 마련이다. 사랑했었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화해하고 싶어도 화해할 수도 없다. 예전처럼 돌아가려는 노력이 없는 한 돌아갈 수도 없다. 처음 만나기 전처럼, 그렇게 완전한 타인의 관계로 나아갈 뿐이다.

“그때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사랑받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끊임없이 솟아나는 사랑의 샘물을 가져 타인에게 퍼부을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한때 나에게 그 물이 약간이나마 고여 있었다면, 이제는 마른 흙바닥만 남아 있었다. 알고 있다. 거기에는 내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아니, 내 책임이 전부라는 것을. 사고를 당한 것은 불운이었지만, 그 후의 내 감정, 내 행동은 모두 선택된 것이었다는 것을.”

사막의 물이 마르듯, 우리들의 마음도 그렇게 말라간다. 사막에 모래바람이 날리듯, 우리의 영혼도 모래바람처럼 날릴 수 있다. 사랑받으려 노력하지도 않기에, 사랑을 주려 애쓰지도 않기에 사랑은 그렇게 서서히 사라져 버린다.

“중동의 사막 지방에서 서식하는 그 동물은, 불속에서 사는 것으로 이집트인들에게 믿어졌었다고 거기 씌어 있다. 도마뱀의 재생력과 불의 정화력이 결합된 믿음일 것이다. 그 짐승의 징그러운 외양에 대조돼 더욱 돋보이는 무늬의 아름다움을 나는 오랫동안 음미한다. 이글거리는 태양에 가까운 지역이 아니라면 결코 새겨질 수 없을 화려함이다. 밝은 레몬 빛에 가까운 투명한 색채. 나비나 흰 새, 젊은 여자의 스카프에 어울릴 법한 강렬한 패턴. 노랑무늬영원, 하고 나는 입속으로 중얼거려본다. 영원이란 도롱뇽과에 딸린 속명일 뿐이라고 씌어 있지만, 그 동명이어의 울림은 가냘프게 내 마음을 움직인다. 왜인지,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미미한 움직임이다.”

노랑무늬영원은 친구 집 아들이 키우는 도롱뇽이었다.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면 다시 재생이 되는 도롱뇽처럼 우리의 삶도 재생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차가워져 가는 사랑도 다시 따뜻해지고, 미워하는 감정도 다시 좋아하게 되는 그러한 마음의 재생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몽고반점>은 한 인간이 사회속에서 때묻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결혼한 지 한참이나 지난 그녀에게는 왜 아직도 몽고반점이 남아 있던 것일까?

“그제야 아내가 온 것을 안듯 처제는 멍한 얼굴로 이편을 건너다보았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시선이었다. 처음으로 그는 그녀의 눈이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어린아이가 아니면 가질 수 없는, 모든 것이 담긴, 그러나 동시에 모든 것이 비워진 눈이었다. 아니, 어쩌면 어린아이도 되기 이전의, 아무것도 눈동자에 담아본 적이 없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그들에게서 몸을 돌려 베란다 쪽으로 다가갔다. 미닫이문을 열어 찬바람이 일시에 밀려오도록 했다. 그는 그녀의 연둣빛 몽고반점을 보았고, 거기 수액처럼 말라붙은 그의 타액과 정액의 흔적을 보았다. 갑자기 자신이 모든 것을 겪어버렸다고, 늙어버렸다고, 지금 죽는다 해도 두렵지 않을 것 같다고 느꼈다.”

처제였던 그녀는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 남들은 그녀를 정신병에 걸린 것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기준에 의해 판단할 경우에나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그는 숨을 죽인 채 그녀의 엉덩이를 보았다. 토실토실한 두 개의 둔덕 위로 흔히 천사의 미소라고 불리는, 옴폭하게 찍힌 두 개의 보조개가 있었다. 반점은 과연 엄지손가락만한 크기로 왼쪽 엉덩이 윗부분에 찍혀 있었다. 어떻게 저런 것이 저곳에 남아 있는 것일까.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약간 멍이 든 듯도 한, 연한 초록빛의, 분명한 몽고반점이었다. 그것이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는 것을, 뜻밖에도 성적인 느낌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식물적인 무엇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그녀는 그저 자신의 마음에 따라, 감정에 따라, 느껴지는 것에 따라 행동하고 살아갈 뿐이었다. 마치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아직도 몽고반점이 사라지지 않은 아이처럼 살아가고 있었을 뿐이다. 그것은 당연히 사회가 규정해 놓은 기준에 부합하지 않을 수밖에 없고, 대부분의 사람들, 가족마저도 그녀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녀를 찍은 테이프들은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광선과 분위기, 그녀의 움직임들은 숨 막힐 만큼 흡인력 있는 것이었다. 어떤 배경음악을 깔아야 할까를 잠시 생각해 보았으나, 진공상태와 같은 침묵이 나았다. 부드럽게 뒤척이는 몸짓과 나신 가득 만발한 꽃들과 몽고반점-본질적인, 어떤 영원한 것을 상기시키는 침묵의 조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어떤 것일까? 그건 아마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웃음이 아닐까 싶다. 아직 몽고반점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의 티 없이 맑게 웃는 모습, 그것보다 더 예쁜 것은 없을 것이다.

예술의 궁극적인 이유는 아마 아름다움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아직 사회의 때를 입지 않은, 사람들의 인위적인 것이 더해지지 않은, 편견과 선입견으로 편협하지 않은, 제도와 윤리라는 것으로 옷 입혀지지 않은, 그러한 인간 본래의 모습에서 아름다움은 존재한다. 그저 그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 그 자체로, 순수한 끌림이라는 그 자체로 충분할 것이다.

“지금 베란다로 달려가, 그녀가 기대서 있는 난간을 뛰어넘어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이다. 삼층 아래로 떨어져 머리를 박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이 깨끗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 못 박혀 서서, 삶의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인 듯, 활활 타오르는 꽃 같은 그녀의 육체, 밤사이 그가 찍은 어떤 장면보다 강렬한 이미지로 번쩍이는 육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처제의 세계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그는 아내가 보는 앞에서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것이 마음 편했을지도 모른다. 사회적으로, 윤리적으로 감당하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 길을 택하지는 않는다. 다만 예술가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건 아마도 그가 바라던 세계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소중한 그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 믿는다고 하더라도, 나에게 그런 비슷한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 생각하더라도, 그러한 일은 다분히 일어나곤 한다. 우리는 그런 커다란 상처가 있어도 살아가야 한다. 모든 것을 잃어서 삶이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여도,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전혀 모른다 해도, 우리는 살아가야만 한다. 한강의 소설 <에우로파>는 어떤 상처를 안고서라도 살아가고 있는 인아에 대한 이야기이다.

“잊을 수 없는 여름밤의 한순간이었다. 인아의 노래가 아름다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청춘의 한복판에 있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 순간 인아를 사랑하게 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다만 인아의 노래가 갑자기 끝났을 때, 지난 이십여 년 동안 억눌러왔던 생생한 갈망이 단박에 빗장을 끄르고 내 심장 밖으로 걸어 나온 것을, 그 어둡고 남루한 골목 한가운데서 나를 마주 보며 서 있는 것을 알아보았다.”

어떤 한순간이 다가왔다. 인아라는 이름이 이제는 확실한 존재가 되어 그렇게 다가왔다. 그 존재로 인해 자신의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어떤 한 존재는 다른 한 존재에게 영향을 주곤 한다. 소중한 존재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

“왜 더 살아야 하는지 설득해 봐,라고 인아가 나에게 말했었다. 그러니까, 내가 더 살아 있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망설이는 나의 대답을 더 기다리지 않고 인아는 말했다. (나한테는 근본적으로 위대함이 결핍돼 있어. 이 얘기도 언젠가 했어. 기억해?) 기억했지만 나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거울에서 몸을 돌려 돌아보자, 인아의 담담한 눈길이 내 얼굴을 찬찬히 응시했다. (내 안에서 가볼 수 있는 데까지 다 가봤어. 밖으로 나가는 것 말고는 길이 없었어. 그걸 깨달은 순간 장례식이 끝났다는 걸 알았어. 더 이상 장례식을 치르듯 살 수 없다는 걸 알았어. 물론 난 여전히 사람을 믿지 않고 이 세계를 믿지 않아. 하지만 나 자신을 믿지 않는 것에 비하면, 그런 환멸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

더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 걸까? 지나간 시간이 그리 의미 있었던 것도 아닌 것 같고, 앞으로 남은 시간도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별반 차이가 없을 것 같은데, 무엇을 바라고 우리는 계속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가볼 때까지 다 가봤는데, 더 이상 새로운 것도 없을 텐데, 우리는 무엇을 바라고 이 세상에서 계속 존재자로 있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이 아주 오래전, 그녀가 위태롭게 어두웠을 때, 단 하룻밤의 몇 시간 동안 허락된 일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일을 겪은 뒤에도 우리가 계속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모든 것이 환영처럼 잠시 이뤄지거나 단박에 파괴된 뒤에도, 검은 바다의 밑면 같은 거리를 한 걸음씩 못을 치며 나아가는 일만 남는 것을 알고 있다. 나 역시 사람을 믿지 않는다고, 고통을 주는 데가 있는 인아의 웃음을 보며 생각한다. 언젠가 그녀가 나를, 내가 그녀를 깊게 상처 입히리란 것을 알고 있다. 우리 산책이 영원하지 않으리란 것을 안다.”

상처를 받고 상처를 주는 것을 이제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차피 내가 사랑하는 소중한 사람한테 아픔을 주기고 하고, 나 또한 그로부터 고통을 받기도 한다. 그런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겁이 나서 그를 버리거나 내가 떠난다고 한다면 영원히 치유되지 못하는 상처로 남게 될 뿐이다.

“에우로파,

너는 목성의 달

암석 대신 얼음으로 덮인 달

지구의 달처럼 하얗지만

지구의 달처럼

흉터가 패지 않은 달

아무리 커다란 운석이 부딪친 자리도

얼음이 녹으며 차올라

거짓말처럼 다시 둥글어지는,.

거대한 유리알같이 매끄러워지는”

목성의 위성, 에우로파처럼 우리의 삶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이제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모든 것을 포용하고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강의 <나무 불꽃>에서 정신 병원에 있는 영혜는 나무가 되고 싶어 한다.

“언니, 내가 물구나무서 있는데, 내 몸에 잎사귀가 자라고, 내 손에서 뿌리가 돋아서 땅속으로 파고 들었어. 끝없이, 끝없이. 응, 사타구니에서 꽃이 피어나려고 해서 다리를 벌렸는데, 활짝 벌렸는데.”

그녀는 왜 나무가 되고 싶어 했던 것일까? 그녀 안에 있는 그 무엇이 그녀를 나무가 되기를 원하게 했던 것일까? 영혜는 나무가 되기 위해 음식을 하나도 먹지 않는다. 나무처럼 물과 햇빛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영혜의 음성은 느리고 낮았지만 단호했다. 더 이상 냉정할 수 없을 것 같은 어조였다. 마침내 그녀는 참았던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네가! 죽을까 봐 그러잖아!

영혜는 고개를 돌려, 낯선 여자를 바라보듯 그녀를 물끄러미 건너다보았다. 이윽고 흘러나온 질문을 마지막으로 영혜는 입을 다물었다.

왜, 죽으면 안 되는 거야?”

영혜는 왜 죽으면 안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삶에 대한 애착이나 미련이 하나도 없었다. 죽음이나 삶에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죽는다고 아쉬울 것도 없는 듯 그녀는 죽음에 대해 어떤 두려움도 없었고, 오히려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 그녀의 삶의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만들었던 것일까?

“맞은편에는 후락한 가건물들이 서 있었고, 차량이 다니지 않는 가장자리의 침목들 사이로 손질 안 된 풀들이 웃자라 있었다.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 전의 어린 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선량한 인간임을 믿었으며, 그 믿음대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성실했고, 나름대로 성공했으며,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후락한 가건물과 웃자란 풀들 앞에서 그녀는 단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본 적 없이 그렇게 세월을 보냈던 영혜와 언니, 돌이켜보면 그들의 삶의 주인은 자신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무가 평생을 그 자리에서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그들의 삶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아니면 사회에 의해 그저 주어진 것들을 해내는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봄날 오후의 국철 승강장에 서서 죽음이 몇 달 뒤로 다가와 있다고 느꼈을 때, 몸에서 끝없이 새어 나오는 선혈이 그것을 증거한다고 믿었을 때 그녀는 이미 깨달았었다. 자신이 오래전부터 죽어 있었다는 것을. 그녀의 고단한 삶은 연극이나 유령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선 죽음의 얼굴은 마치 오래전에 잃었다가 돌아온 혈육처럼 낯익었다.”

영혜가 나무가 되려고 하는 것에서 언니 또한 자신의 삶도 죽어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 누구를 위해 자신은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의 삶을 위해서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하게 돼. 영혜는 자신의 삶이 나무 같았던 삶이었기에, 만약 그렇다면, 차라리 아예 나무가 되려고 했던 것이다.

“아직 어두운 새벽, 지우가 깨어나기 전까지의 서너 시간. 어떤 살아 있는 것의 기척도 들리지 않는 시간. 영원처럼 길고, 늪처럼 바닥이 없는 시간. 빈 욕조에 웅크려 누워 눈을 감으면 캄캄한 숲이 덮쳐온다. 검은 빗발이 영혜의 몸에 창처럼 꽂히고, 깡마른 맨발이 진흙에 덮인다. 그 모습을 지우려고 고개를 흔들면, 어째서인지 한낮의 여름 나무들이 마치 초록빛의 커다란 불꽃들처럼 그녀의 눈앞에 어른거린다. 영혜가 들려준 환상 때문일까. 살아오는 동안 보았던 수많은 나무들, 무정한 바다처럼 세상을 뒤덮은 숲들의 물결이 그녀의 지친 몸을 휩싸며 타오른다. 도시들과 소읍들과 도로는 크고작은 섬과 다리들처럼 그 위로 떠올라 있을 뿐, 그 뜨거운 물결에 밀려 어디론가 서서히 떠내려가고 있을 뿐이다.”

영혜와 언니는 나무 같은 삶을 끝내고 싶었다. 나무에 불이 붙어 찬란하게 불꽃이 타오르는 것처럼, 그들은 지금까지 살아온 것들이 모두 타 사라지기를 희망했다. 자신의 삶이 아닌 그저 주어진 위치에서 주어진 대로 살아가야 하는 인생 자체에 무의미함을 느낄 뿐이었다.

우리의 삶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나는 얼마나 나의 삶의 주인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냥 나무처럼 주어진 대로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 해야 할 일을 하고, 주어진 대로만 지내고, 나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닌 다른 것들을 위한 나의 삶으로만 나의 인생은 채워져 가는 것은 아닐까? 그러한 삶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 것일까? 내가 주인이 아닌 삶이라면 나는 왜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지극히 평범했던 사람이 갑자기 바뀔 수가 있는 것일까? 평상시에 먹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던 사람이 어느 날부터 육식을 전혀 하지 않고 채식만 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의 삶은 어디로 흘러갈지 전혀 알 수가 없다. 평범한 삶이 갑자기 어떻게 될지는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다. 아무 일 없이 주어진 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우리의 삶은 예상하지 못한 일들로 인해 그동안 살아왔던 것들이 완전히 바뀔 수도 있다.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는 한 평범했던 회사원의 아내가 어느 날 갑자기 채식주의자가 되면서 일어나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이다. 그의 아내는 왜 채식주의자가 됐던 것일까?

“발에 물컹한 것이 밟혀 나는 말을 멈췄다.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아내는 어젯밤과 똑같은 잠옷차림으로, 부스스 헝클어진 머리를 늘어뜨린 채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녀의 몸을 중심으로 희고 검은 비닐봉지들과 플라스틱 밀폐용기들이 발 디딜 데 없이 부엌 바닥에 널려 있었다. 샤브샤브용 쇠고기와 돼지고기 삼겹살, 커다란 우족 두 짝, 위생팩에 담긴 오징어들, 시골의 장모가 얼마 전에 보낸 잘 손질된 장어, 노란 노끈에 엮인 굴비들, 포장을 뜯지 않은 냉동만두와 내용물을 알 수 없는 수많은 꾸러미들.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아내는 커다란 쓰레기봉투에 그것들을 하나씩 주워 담는 중이었다.”

아내는 무슨 이유로 냉장고에 있던 고기와 생선을 모두 버린 것일까? 그전에는 먹는 데 있어서 지극히 정상적인 그녀였기에 남편은 아내의 갑작스런 행동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난 무서웠어. 아직 내 옷에 피가 묻어 있었어. 아무도 날 보지 못한 사이 나무 뒤에 웅크려 숨었어. 내 손에 피가 묻어 있었어. 내 입에 피가 묻어 있었어. 그 헛간에서, 나는 떨어진 고깃덩어리를 주워 먹었거든. 내 잇몸과 입천장에 물컹한 날고기를 문질러 붉은 피를 발랐거든. 헛간 바닥, 피웅덩이에 비친 내 눈이 번쩍였어. 그렇게 생생할 수 없어. 이빨에 씹히던 날고기의 감촉이. 내 얼굴이, 눈빛이. 처음 보는 얼굴 같은데, 분명 내 얼굴이었어. 아니야, 거꾸로, 수없이 봤던 얼굴 같은데, 내 얼굴이 아니었어. 설명할 수 없어.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 생생하고 이상한, 끔찍하게 이상한 느낌을.”

그녀가 갑자기 채식주의자가 된 것은 꿈을 꾸었기 때문이었다. 그 꿈이 그녀를 전혀 육식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왜 그런 꿈을 꾸었던 것일까? 꿈을 꾸었다고 해서 그 꿈이 무서워 육식을 하지 않는 채식주의자가 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내 다리를 물어뜯은 개가 아버지의 오토바이에 묶이고 있어. 그 개의 꼬리털을 태워 종아리의 상처에 붙이고, 그 위로 붕대를 친친 감고, 아홉 살의 나는 대문간에 나가 서 있어. 무더운 여름날이야. 가만히 있어도 땀이 뻘뻘 흘러내려. 개도 붉은 혓바닥을 턱까지 늘어뜨리고 숨을 몰아쉬고 있어. 나보다 몸집이 큰, 잘생긴 흰 개야. 주인집 딸을 물어뜯기 전까진 영리하다고 동네에 소문났던 녀석이었지. 그날 저녁 우리 집에선 잔치가 벌어졌어. 시장 골목의 알 만한 아저씨들이 다 모였어. 개에 물린 상처가 나으려면 먹어야 한다는 말에 나도 한입을 떠넣었지. 아니, 사실은 밥을 말아 한 그릇을 다 먹었어. 들깨 냄새가 다 덮지 못한 누린내가 코를 찔렀어. 국밥 위로 어른거리던 눈, 녀석이 달리며, 거품 섞인 피를 토하며 나를 보던 두 눈을 기억해. 아무렇지도 않더군.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몰랐던 유년 시절의 기억은 잠재의식 속에 남았고 세월을 거치면서 그와 비슷한 일들이 그렇게 누적되었다. 그리고 어느 한순간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이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어떤 고함이, 울부짖음이 겹겹이 뭉쳐져, 거기 박혀 있어. 고기 때문이야.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틀림없어.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한 번만, 단 한 번만 크게 소리치고 싶어. 캄캄한 창밖으로 달려 나가고 싶어. 그러면 이 덩어리가 몸 밖으로 뛰쳐나갈까. 그럴 수 있을까. 아무도 날 도울 수 없어. 아무도 날 살릴 수 없어. 아무도 날 숨 쉬게 할 수 없어.”

누군가에게는 다른 사람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기 마련이다. 그 무엇이 그 사람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버릴 수가 있다. 어떤 상황이 와도 그 힘을 이겨낼 수 없을 만큼 그 무엇이 그에게 있어서는 그렇게 커다란 것일 수밖에 없다.

“아내는 분수대 옆 벤치에 앉아 있었다. 환자복 상의를 벗어 무릎에 올려놓은 채, 앙상한 쇄골과 여윈 젖가슴, 연갈색 유두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왼쪽 손목의 붕대를 풀어버렸고, 피가 새어 나오기라도 하는 듯 봉합 부위를 천천히 핥고 있었다. 햇살이 그녀의 벗은 몸과 얼굴을 감쌌다. 나는 아내의 움켜쥔 오른손을 펼쳤다. 아내의 손아귀에 목이 눌려 있던 새 한 마리가 벤치로 떨어졌다. 깃털이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작은 동박새였다. 포식자에게 뜯긴 듯한 거친 이빨자국 아래로, 붉은 혈흔이 선명하게 번져 있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면의 쌓여가는 그 모든 것은 어느 순간 갑자기 튀어나와 우리의 전체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지 모른다. 그것이 꿈일 수도 있고, 사소한 말 한 마디 일수도 있으며, 아무 생각 없이 습관처럼 했던 행동일수도 있고, 사진 한 장일수도 있으며, 사실이 아니지만 다른 사람에게 들은 소문일수도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먹었던 고기와 생선이 그녀에게는 다른 존재의 생명이라는 것을 그녀는 어느 순간 갑자기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해서 그녀는 생명을 앗아가는 존재였기에 자신의 그러함에 대해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그러한 길로 갈 수 없기에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지극히 비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도 어느 순간 그녀처럼 ‘채식주의자’의 삶을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나의 내면 속에 잠자고 있던 것이, 혹은 내 주위의 수면 밑에서 숨고 있던 그 무엇이 이제는 그동안 살아왔던 삶을 좌우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 나의 삶을 휘감아버릴지도 모른다. 삶은 그래서 어렵고 무거울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이 세상에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상향은 그저 이상향일 뿐이다. 현실은 유토피아가 아니기에 디스토피아일까? 아니면 유토피아를 꿈꾸기에 디스토피아일까? 유토피아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강의 <훈자>는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를 꿈꾸는 우리의 현실을 한 번쯤은 돌아봐야 할 필요를 생각하게 해 주는 소설이다.

“그러나 그 여자가 그것 때문에 고통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지난 몇 해 동안 하루라도 깊이, 죽은 듯이 잠들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초죽음이 될 때까지 야근과 밤샘을 반복해야 하는 감사 시즌이 닥쳐오고 있다. 그 여자의 남편은 상황이 더 나빠졌고, 그 여자의 아들은 지금 혼자서 그 여자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중 어떤 것도 그 여자가 지금 느끼는 고통을 다 설명할 수 없다.”

훈자는 지리적으로 인도의 북서부 파키스탄의 잠무카슈미르에 있는 곳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유토피아가 있다면, 이런 곳일까? 우리는 그곳에 갈 수 있을까? 현실에서 만날 수 있는 곳일까? 우리는 왜 훈자라는 유토피아를 생각하는 것일까?

“어디로 눈을 들어도 해발 육천 미터의 눈 덮인 봉우리들이 보이는,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길. 탄식처럼 갑자기 훈자는 나타날 것이다. 지대가 높아, 늦은 봄이 되어서야 살구꽃이 지천으로 피는 곳. 가을이면 말린 살구가 가게마다 그득한 곳. 한번 들어가면 떠나고 싶지 않아지기 때문에 장기 여행자들의 블랙홀이라 불리는 곳.”

현실은 어쩌면 유토피아가 될 수 없는 곳임에 너무나 분명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훈자를 가보고 싶어 하는 것일까? 비록 그곳이 유토피아는 아니지만, 한 번이라도 그런 곳에 가볼 수 있음으로 유토피아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싶지 않기에 그런 꿈을 꾸는 것일까? 아니면 지금 발을 디디고 있는 이 디스토피아를 어쨌든 벗어나고 싶기에 그런 희망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일까?

“젊은 아동 상담사는 심각한 표정을 건너다보며, 애써 담담하게 그 여자는 설명했다. 좀 더 많은 시간 아이를 돌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자신의 상황에 대해. 육아를 책임질 수도, 정서적으로 돌볼 수도 없는 남편의 성격에 대해. 상담사는 그 여자의 고백에 전적으로 – 직업적으로 – 공감했고, 더 이상 양쪽 가계의 정신병력을 물으며 눈을 동그랗게 뜨지 않았다. 대신 세 가지 해결책을 그 여자에게 주었다. 첫째, 아이를 돌봐줄 제삼의 조력자를 찾는 것. 둘째, 아이와 함께 있는 동안만큼은 근심 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셋째, 그 여자의 남편을 자신에게 보내 상담받게 하는 것. 덧붙일 것 없이 분명한 그 답들을 받아 들고 그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실이 버겁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마음 편하게 평생을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이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을까? 누구나 행복을 꿈꾸지만, 우리는 얼마나 행복을 느끼면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더 이상 그 여자는 훈자를 생각하지 않았다. 훈자인 훈자도, 훈자가 아닌 훈자도 생각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으나, 더 이상 악몽에 시달리지 않았다. 그러자 어느 날인가부터, 수면 부족 때문에 실제보다 표면이 건조하고 거칠어 보이는 사물들 위로, 결코 훈자일 수 없는 것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것이 훈자라는 것을 오직 그 여자만 알 수 있는 것들, 그것이 왜 훈자인지 누구에게도, 자신에게조차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훈자를 꿈꾸지 않았다. 희망은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지 않는다. 꿈은 단지 꿈일 뿐 깨어나고 나면 허무할 뿐이다. 삶은 그저 받아들임으로 족하다. 그것이 아마 우리가 갈 수 있는 훈자, 즉 유토피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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