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버림을 받을 수 있다. 나이가 들어 자식한테 버림을 받을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한테 버림을 받을 수도 있고, 평생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한테도 버림을 받을 수 있다. 한강의 <여수의 사랑>은 버림받아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삶의 아픔을 이야기하고 있다.
“두 살쯤 되었을 때 나는 강보에 싸인 채로 열차 안에서 발견됐대요. 보호자 없이 울고 있는 것을 서울역에서 발견한 역원들이 파출소까지 데려다주었대요. 자흔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내 고향, 여수가 아닐지도 몰라요. 다만 그 기차가 여수발 서울행 통일호였다고 하니까 어릴 때부터 그곳이 내 고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거예요. 지나가는 얘기라도 여수, 라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쩡 하고 울리곤 했어요.”
인생에서 버림을 받은 것만큼 아픈 상처가 있을까? 나를 버리는 사람은 나와 가까이 있었던 사람, 믿고 의지했던 사람, 깊은 인연으로 맺어진 사람이지 결코 나와 관계가 먼 사람은 아니다. 가까운 사람이었기에 그 버림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아플 수밖에 없다.
“바로 거기가 내 고향이었던 거예요. 그때까지 나한테는 모든 것이 낯선 곳이었는데, 그 순간 갑자기 가깝고 먼 모든 산과 바다가 내 고향하고 살을 맞대고 있는 거예요. 난 너무 기뻐서 바닷물에 몸을 던지고 싶을 지경이었어요. 죽는 게 무섭지 않다는 걸 그때 난 처음 알았어요. 별게 아니었어요. 저 정다운 하늘, 바람, 땅, 물과 섞이면 그만이었어요.”
그 사람이 나를 왜 버린 것일까? 이유야 어쨌든 버림받은 것은 사실이고 돌이킬 수는 없다. 나에게 닥친 그 불행의 시간을 다시 되돌릴 수도 없다. 하지만 살아가다 보면 그 버림받은 것도 별것 아닐 수 있다. 죽음과 삶이 경계가 없다는 것을 아는 이상, 그 버림받음이 생명보다 크지는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나를 버린 사람이 내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거나 하늘이 맺어준 인연일지라도 나의 생명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스물다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등진 어린 어머니의 아련한 품속처럼, 수천수만의 물고기 비늘들이 떠올라 빛나는 것 같던 봄날의 여수 앞바다처럼 자흔의 가슴은 다사롭고 포근하였다. 그리고 새벽녘이 되어 내가 깊이 잠든 사이에 자흔은 떠났다. 밑창이 떨어진 단벌 구두를 꿰어 신고, 두 개의 볼썽사나운 여행 가방과 옷 보퉁이를 싸 들고 갔다.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사위가 훤하게 밝아 있었다. 아무렇게나 못에 걸리고 바닥에 널려 있던 자흔의 소지품들이 사라진 방은 낯설고 적막했다. 온 방과 세면장이 안개 같은 정적으로 부옇게 젖어 있었다.”
나를 버린 것을 원망할 필요도 없다. 삶에는 내가 모르는 그 어떤 것이 가끔은 상상하는 것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내가 어쩌지 못한다는 것이 인생이라는 사실이 슬프기는 하지만 차라리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낫다.
버림받은 그 상처를 치유받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상관이 없다. 그 상처를 나 스스로 그 상처를 치유하면 될 뿐이다. 버림받은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이겨내고 나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며 나만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아파한다고 해서, 힘들다고 해서, 나를 버린 이를 미워하거나 용서하지 못한다고 해서, 버림받은 나의 삶이 바뀌지는 않는다.
따스한 햇살이 없으면 나 스스로 내 마음속에 햇살을 비추고, 마음속에 부는 찬 바람을 따스한 바람으로 바꾸면 될 뿐이다. 나의 아픔을 스스로 치유하는 것이 진정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나의 삶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