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둘러싼 삶의 모든 것들이 나를 힘들게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밝은 것은 하나 없고 온통 어둠뿐이라면 그 어둠 속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 것일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외면하고, 경제적 여건이나, 주위의 모든 환경이 비관적이라면 나라는 존재는 결코 삶에 대해 긍정적일 수가 없을 것이다. 한강의 <어둠의 사육제>는 그나마 스스로 가졌던 조그만 희망도 잃어버린 채 삶의 끝에 선 한 외로운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진눈깨비가 어지럽게 흩날리는 오후였다. 얼굴이 허옇게 뜬 인숙 언니를 부축하여 택시 뒷좌석에 태우며 나는 울었다. 인숙 언니의 턱에는 실신하면서 계단 턱에 부딪힌 상처가 삼센티미터가량 으깨어져 있었다. 택시가 출발하자 인숙 언니는 옆에 앉은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뒤 그나마 지탱하고 있던 의식을 잃었다. 택시 앞 유리창에서는 두 개의 와이퍼가 뿌옇게 흐려지는 서울 거리를 닦아내고 있었고, 라디오에서는 퀴즈 프로를 진행하는 남녀가 기성에 가까운 웃음을 터뜨렸다.”
삶은 수많은 모순으로 가득차 있다. 누군가는 생사의 기로에 서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 반면, 누군가는 삶을 유희처럼 즐기고 있다. 노력해도 되지 않는 것들이 많다는 것을 알아가면서 삶에 대한 희망을 조금씩 놓게 된다. 그렇게 소중한 것을 하나씩 잃어버리면 살아가는 것이 인생인 걸까?
“주인 아낙은 인숙 언니와 내가 따로 작성해 가지고 있었던 계약서 두 장을 꺼내보였다. 인숙 언니는 전세금을 모두 빼낸 뒤 이삿짐 트럭까지 불러 이날 오전에 떠나버렸다는 것이었다. 내 사진첩 깊숙이 뒤집어서 꽂아두었던 계약서를 언제, 어떻게 인숙 언니가 찾아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믿을 수 없었다. 그날 밤 어질러진 장판 바닥에 넋을 잃고 앉아 나는 모든 것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인숙 언니가 빼간 전세금은 지난 사 년간 내가 키워온 희망이었다. 내 대학이었고, 장래였고, 젊음의 담보였다. 그것은 내 인생 전부였다.”
어둠 속에서 스스로 빛을 만들어 보고자 노력했지만, 그 빛마저 나를 외면하고 그동안의 모든 최선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경험한다면, 삶에 대한 애착을 하나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믿었던 사람한테, 그나마 의지하던 사람에게 배신마저 당한다면 삶에 대한 회의마저 들게 될지 모른다.
“서울에 올라와서 보낸 사 년 동안 나는 내 힘으로 산 것이 아니라 희망의 힘으로 살아왔었다. 나는 무엇이든 견디어낼 수 있었다. 비록 지금은 미운 오리 새끼처럼 세상의 구석에 틀어박혀 원치 않는 일에 시달리고 있지만, 언젠가 진짜 삶이 시작되고 말 것이라고 주문처럼 믿어오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진짜 삶이 과연 한 발 한 발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던 바로 그때 인숙 언니는 떠났다. 나는 그녀로 인해 내가 잃은 돈과 신뢰만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나는 삶과 화해하는 법을 잊은 것이었다. 삶이 나에게 등을 돌리자마자 나 역시 미련 없이 뒤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잘 벼린 오기 하나만을 단도처럼 가슴에 보듬은 채, 되려 제 칼날에 속살을 베이며 피 흘리고 있었다.”
아무리 화해하려고 해도 상대가 외면한다면 화해를 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삶 또한 마찬가지다. 힘들지만 그래도 남은 세월을 위해 희망으로 버텨왔지만, 그 희망마저 잃어버린다면 삶과의 화해는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이제 그것들은 나에게 위안이 아니었다. 절망보다도 넌덜머리 나는 미련이었다. 아무런 가능성도 없이 그저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그 가슴마다 무작정 들러붙어 꿈틀거리는 미련, 흡사 피를 빨아먹는 환형동물 같은 그것을 어떻게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지난 한 달 내내 저 불빛들을 보지 않기 위해 등을 돌리고 누워버리곤 했던 것이었다.”
조그만 가능성이라도 남아있다면 오늘을 버틸 터인데, 이제는 그런 힘마저 잃어버렸다. 오늘을 살아내기 힘들기에 내일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내일도 오늘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화해를 하려는 의도조차 어쩌면 사치일지 모른다. 그러한 노력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 또 어디로 가나, 하고 침을 뱉듯이 뇌까리며 내려놓았던 보퉁이를 양손에 집어 들었다. 가방을 어깨에 둘러멨다. 푸른 신호가 켜졌다. 네 박자의 날카로운 신호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복사열이 끓어오르는 아스팔트를 성큼성큼 밟아가는 내 눈앞에 흐물거리는 어둠이 무너져 내렸다. 그 어둠 위로 수천수만의 불빛들이 일제히 점화되었다. 그것들은 마른 톱밥을 사른 불티들처럼 지상의 어둠을 에워싸고 너울대다가 이윽고 먹빛 허공 속으로 손짓하며 스러져갔다. 어디선가 목청껏 고함치는 소리, 합창 소리, 폭죽처럼 터지는 휘파람 소리들이 아득하게 메아리치고 있었다.”
화해를 하지 못한다면 화해하지 못한 채로 살면 된다. 원래부터 화해를 할 수 없는 운명인지도 모르기에 그 노력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삶은 하나가 아니다. 화해할 수 없는 삶은 미련 없이 버리고 다른 삶을 살아가면 될 뿐이다. 누군가와 화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내가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다.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살아가면 될 뿐이다. 삶의 어느 부분과 화해가 어렵다면 다른 부분만으로 살아가도 상관없다. 물론 완벽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커다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삶은 그 자체가 원래 완벽하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