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은 1783년 동지사로 떠나는 그의 아버지 이동욱과 함께 북경으로 갔다. 그곳에서 이승훈은 40여 일 머무르며 서양인 신부 그라몽에게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천주교 세례를 받았다. 그다음 해인 1784년 조선으로 돌아올 당시 수십 종의 천주교 서적과 십자고상(十字苦像), 묵주, 상본 등 천주교 물품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조선에 귀국한 이승훈은 이벽, 권일신, 정약용에게 세례를 주고 그들과 함께 김범우의 집에서 정기적인 신앙 집회를 가짐으로써 한국천주교회가 창설되었다.
이승훈의 어머니는 이가환의 누이였고, 이승훈은 훗날 정재원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정재원은 첫 번째 부인에게서 정약현을 두 번째 부인에게서는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을 낳았다. 따라서 이승훈과 정약용 형제간은 처남·매부 사이였다. 이승훈, 이가환, 그리고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은 함께 천주교 집회에서 모여 예배와 천주교 교리에 대해 토론하곤 하였다. 정약현에게는 맏딸 정명련이 있었는데 정명련은 황사영과 결혼하였고, 황사영 또한 천주교인이 되었다.
정조가 죽고 1801년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천주교인 수백 명이 처형되는 신유박해가 일어난다. 이승훈, 정약종, 이가환, 권철신, 주문모는 참수되고 황사영은 능지처참 되었다.
정약용을 제거하기 위한 노론 벽파는 정약용이 천주교인임을 빌미로 그를 형틀에 묶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정약용은 천주교를 주저하지 않고 배교하였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천주교인임을 부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인 배교의 길을 걸었다. 그는 주문모 신부의 존재를 토설했고, 황사영과 이승훈을 이단의 무리라고 저주했다고 한다.
거기서 나아가 정약용은 전국 각지에 있는 천주교인을 색출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고 실제로 포도청은 이를 활용하여 많은 천주교를 색출하고 체포하였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이로 인해 황사영의 백서가 발견되어 조선의 조정은 엄청난 피바람이 불었다. 정약용의 이러한 배교는 그의 참수형을 면해 유배로 끝나게 되었고 후에 복권되어 다시 조정에 들어갈 수 있었다.
정약용은 죽을 때까지 당시 상황이나 자신의 내면에 대해 침묵하였다. 자신의 배교로 인해 죽은 사람들에 대한 그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알 수는 없다.
이승훈 또한 죽음의 앞에서는 신앙에 대해 확신을 잃었다고 역사는 전한다. 이승훈은 자신이 정약용에게 영세를 준 사실을 폭로했고, 정약전을 밀고하였다. 그 또한 자신을 욕한 정약용을 저주했다. 처남과 매부 관계였던 이승훈과 정약용은 형틀에 묶인 채 그렇게 서로를 폭로하고 저주하였다.
이승훈은 한국 최초의 세례교인이었지만 그의 형이 집행되기 전 그는 천주교를 배교할 태도를 분명히 했다. 하지만 이미 형이 선고되었기에 집행은 돌이킬 수 없었다. 이승훈은 순교도 배교도 아닌 어정쩡한 상황에서 형장의 이슬이 되어 버렸다.
<한국천주교회사>에는 이승훈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천주교인이건 아니건 그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배교로도 그의 목숨은 구할 수 없었다. 그는 하느님께 돌아온다는 간단한 행위만으로도 그 피할 수 없는 형벌을 승리로 바꿀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배교를 철회한다는 조그만 표시도 하지 않고 숨을 거두었다. 최초로 영세한 그가, 자기 동포들에게 영세와 복음을 전했던 그가, 순교자들과 함께 죽음의 자리로 나아갔으나 그는 순교자는 아니었다. 그는 천주교인이기 때문에 참수되었으나 그는 배교자로서 죽었다. 하느님 당신의 심판은 얼마나 정의롭고 무섭습니까.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샤를르 달레는 이벽, 이가환, 이승훈, 권일신, 정약용, 정약전 모두를 배교자로 구분했고 그들을 순교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오직 정약종과 황사영만이 끝까지 배교를 거부해 순교자로 남았다. 정약종은 천주를 바라보고 죽겠다고 하여 하늘을 향해 누운 채 망나니의 칼을 받았고, 황사영은 사지가 찢겨 그의 몸이 6등분이 된 채로 죽음을 맞이했다.
정약용과 이승훈은 한때 같은 공간에서 천주를 섬겼으나 죽기 전엔 서로에게 등을 돌렸고, 죽은 후 정약용은 두물머리의 북쪽 능내마을에 묻혔고, 이승훈은 두물머리 남쪽 퇴촌마을에 묻혔다.
거칠게 흐르는 시대의 격랑과 죽음 앞에서 인간의 내면과 의지는 약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조선인 최초의 세례자는 그렇게 배교자로서 끝나 버렸고, 조선 실학을 집대성한 학문의 거두 또한 함께했던 신앙의 동료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영원히 침묵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