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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사랑을 쌓고

by 지나온 시간들

숨을 쉰다는 것을 생명을 뜻한다. 태어나 지금 여기에 오기까지 나에게 생명처럼 중요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 사람은 나를 얼마나 변화시켰던 것일까? 생명처럼 소중한 사람도 언젠가는 떠나야 할 터인데 그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신경숙 <깊은 숨을 쉴 때마다>는 오래도록 함께했던 소중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도시에는 가난하지만 얼굴이 흰 큰오빠가 있었다. 사랑하는 오빠. 태어난 마을에서는 영어책을 큰 소리 내어 읽는 오빠를 무서워했지만, 도시로 나온 그 해부터 지금까지 오빠를 사랑하지 않았던 적이 한 순간도 없다. 가난해서 데모도 못했던 청년, 나는 오빠의 가난에 보태진 혹, 그가 터무니없이 내게 화를 내도 나는 그를 사랑했다. 한번, 오빠가 내게 참을 수 없는 말을 했다. 너 보따리 싸가지고 집에 가버려라. 가슴이 퉁퉁 붓는 느낌. 오빠 그때 내게 너무 했나 봐. 그로부터 세월이 얼만데 그 생각을 하니 또 가슴이 붓네.”


세월은 사랑을 쌓는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일을 함께 겪었기에 사랑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좋았다가 미웠다가 화해했다가 다시 또 싸우는 그 과정은 지구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랑으로 거듭나기 마련이다. 그 과정을 버티지 못한다면 그것으로 사랑은 끝난다. 혈육의 사랑이 깊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천륜은 운명이기에 끊어지지 않는다.


“문 여는 소리가 나자 그 외진 방에서 대문까지 뛰쳐나와 대번에 내 뺨을 치던 오빠. 어디… 갔었어, 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린 와락 껴안고 눈물을 터뜨렸지. 오빠아- 참말이지, 70년대 식이다. 나는 오빠의 가난. 내가 대학을 꿈꾸지 않았으면 오빠가 좀 덜 가난했을지도. 어쨌든 오빠의 가난인 나는 아침이면 다락방에서 내려와 그의 도시락을 싸고 있다. 그의 가발을 꺼내 빗질하고 있다. 그가 밤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전철역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그 시절의 내 우주. 나는 그를 기준 삼아 자전하고 공전했다. 그때 싹튼 사랑이 아직 살아서 팔딱인다. 그건 내 생애를 지배할 것이다.”


사랑하기에 화가 나고 사랑하기에 미워지는 것일까? 아무런 감정이 없다면 그러한 것은 아예 생기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한 아픔과 상처를 극복하고 나서야 삶의 중심이 되는 인연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스쳐 지나가는 인연에게는 화가 나거나 마음을 아프게 하지는 않는다.


“이제 갑자기 나 혼자서 뭘 해야 될지를 나는 모르겠어요. 나는 그 애가 다시 올 수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게 믿기지가 않아서, 날마다 그 애를 기다렸죠. 금방 그 애가 나타날 것 같았어요. 잘 마른 수건을 볼 때면 그 애에게 주려고 여깄어, 말하곤 했죠. 그 앤 누구라도 한 번 손을 댄 수건은 절대 쓰지 않았거든요. 물건을 사도 두 개씩 사는 버릇이 들어서 그 애가 다 먹어버릴까 봐 얼른 내 앞으로 당겨놓고… 떠나보면 그 애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에 가보면 혹시 혼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여기로도 그 애가 찾아올 것만 같고….”


나의 가장 소중했던 인연이 떠나가 버린 시공간을 어떻게 버텨야 하는 것일까? 떠났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고 불현듯 나타날 것만 같은 마음 깊이 자리 잡은 그 사람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당신이 떠나고 얼마 안 있어 나도 그곳을 떠나왔답니다. 그 애의 죽음을 내가 이 세상 바깥으로 나가는 다른 시작으로 받아들이고 살고 있는 것이 때로 슬프지만 어쨌든 살아가고 있어요. 어떤 일을 당하고도 살아진다는 사실이 신비롭기도 하고 사무치기도 해요. 더듬더듬 혼자서 다시 첼로를 켜는 일에 익숙해졌고, 쉽지는 않지만 친구도 사귀어가고 있습니다.”


소중한 인연을 잃고서도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 인생인 것일까? 비록 마음 아프지만 그래도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그 오랜 세월 함께했던 아름다운 시간과 추억이 마음 깊이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그 사람은 나도 모르는 그곳에서 그가 있었던 때처럼 살아가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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