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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온 시간들 Jul 14. 2023

블랙홀의 정체

  블랙홀의 이론적 기원은 17세기 뉴턴의 중력이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책 <프린키피아>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충분히 빠른 속도로 포탄을 발사하면, 지구를 완전히 한 바퀴 돌아 처음 위치로 돌아온다.’ 


  물론 대포를 수평 방향으로 발사했을 때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만일 지면과 수직하게 세워서 위로 발사하면 어떻게 될까? 이런 경우 포탄이 최고 높이에 도달한 후 다시 지면으로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포탄의 속도가 충분히 빨라서 탈출속도에 도달하면 다시 떨어지지 않고 우주공간으로 계속 날아간다. 뉴턴의 법칙으로 계산된 지구의 탈출속도는 약 시속 4만 킬로미터이다. 


  1783년 영국의 존 미첼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탈출속도가 광속보다 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주 거대한 천체에서 방출된 빛은 아무리 달려도 탈출속도를 초과할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별의 표면으로 떨어질 것이다. 다시 말해 빛조차 탈출할 수 없게 된다. 미첼은 이러한 별을 검은 별이라고 불렀다. 빛이 중력에 갇혀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외부에서 볼 때 완전히 검은색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1700년대의 과학자들은 별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고, 빛의 속도가 얼마인지도 몰랐기 때문에 미첼의 가설은 별 관심을 끌지 못했다. 


  1916년 독일의 칼 슈바르츠실트는 러시아 전선의 포병부대에 배치되어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그는 전쟁터에서 아인슈타인이 발표한 일반상대성이론 논문을 읽다가 아인슈타인 방정식을 만족하는 정확한 해를 떠올렸다. 그는 일반상대성이론을 은하나 우주 전체에 적용하는 대신, 가장 간단한 물체인 점입자에 적용해보았다. 커다란 천체도 충분히 먼 거리에서 보면 점처럼 보이므로, 점입자가 만드는 중력장은 커다란 구형 천체가 만든 중력장을 먼 거리에서 바라본 것과 비슷하다. 게다가 이 계산 결과는 실험으로 확인할 수도 있다. 


  아인슈타인 슈바르츠실트는 논문을 읽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슈바르츠실트가 찾은 해가 태양의 중력에 의해 휘어지는 별빛이나 서서히 이동하는 수성의 공전궤도처럼 자신의 이론을 더욱 정확하게 검증하는 수단임을 깨닫고, 방정식의 대략적인 해를 찾던 기존의 연구를 걷어치우고 이론의 정확한 결과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가 블랙홀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두 사람의 연구 덕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슈바르츠실트가 구한 해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당혹스러운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의 해는 처음부터 시공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이상한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즉 질량이 엄청나게 큰 별의 주변을 가상의 구가 에워싸고 있었던 것이다. 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보면 중력장은 뉴턴이 예견한 값과 거의 비슷해진다. 그래서 슈바르츠실트의 해는 중력을 나타내는 근삿값으로 활용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이런 별 근처를 지나가다가 사건 지평선을 통과한다면 중력장에 갇혀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몸은 무지막지한 중력에 의해 완전히 으스러질 것이다. 


  사건 지평선에 가까이 갈수록 이상한 일은 이어서 벌어진다. 예를 들어 당신은 수십억 년 동안 블랙홀에 갇힌 채 그 주변을 선회하는 별빛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머리를 잡아당기는 힘보다 발을 잡아당기는 힘이 훨씬 강해서 몸이 가늘고 길게 늘어나다가, 결국은 원자까지 산산이 분해될 것이다. 


  이러한 사건을 멀리서 누군가가 보고 있다면, 그의 눈에는 사건 지평선에 가까이 접근한 우주선 내부의 시간이 느리게 흐르다가 우주선이 사건 지평선에 도달하는 순간부터 시간이 완전히 멈춘 것처럼 보인다. 신기한 것은 우주선에 탄 사람에게는 사건 지평선을 통과할 때도 모든 상황이 정상이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너무나 기이한 현상이어서 수십 년 동안 물리학자들은 현실 세계에서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아인슈타인 방정식의 부산물로 여겨왔다. 


  아인슈타인 자신도 정상적인 환경에서는 블랙홀이 절대 생성될 수 없다는 논문을 발표했고, 1939년에는 소용돌이치는 구형 기체가 자체 중력으로 아무리 압축해도 사건 지평선의 지름보다 작은 블랙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증명했다. 


  하지만 같은 해에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그의 제자 하틀랜드 스나이더는 블랙홀이 아인슈타인이 미처 고려하지 않은 자연적인 환경에서 생성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우리의 태양보다 약 10~50배쯤 무거운 별이 오랜 세월 동안 빛을 발하다가 핵연료를 모두 소비하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는 초신성이 된다. 이때 폭발하고 남은 잔해가 자체 중력으로 인해 계속 수축되면 블랙홀이 될 수 있다. 


  물리학자들이 알아낸 바에 의하면 블랙홀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거성의 잔해에서 탄생한 블랙홀이고 하나는 은하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은하 블랙홀이다. 은하 블랙홀은 우리의 태양보다 무려 수백만~수십억 배나 무겁다. 많은 천문학자들은 모든 은하의 중심에 블랙홀이 있을 것으로 믿고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천문학자들은 우주 전역을 조사한 끝에 블랙홀이 될 가능성이 있는 천체를 수백 개 발견했다. 우리은하의 중심에는 질량이 태양보다 200만~400만 배나 큰 블랙홀이 자리 잡고 있는데, 위치상으로는 궁수자리 근처이다. 


  양자이론을 중력에 적용했을 때도 블랙홀은 커다란 관심거리가 되었다. 스티븐 호킹은 대학원생일 때 중력에 양자역학을 접목하는 문제에 뛰어들었다. 호킹은 사고의 방향을 약간 틀어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은 심오한 질문을 떠올렸다. ‘두 이론을 결합하여 블랙홀에 양자역학을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그는 중력의 양자 보정이 너무 어려운 문제임을 알고 있었기에 좀 더 쉬운 문제를 공략하기로 마음먹었다. 중력의 양자 보정은 무시하고, 블랙홀 안에 있는 원자의 양자 보정을 계산하였다. 


  블랙홀에서는 아무것도 탈출할 수 없다고 했지만, 호킹은 이것이 양자이론에 위배된다고 생각했다. 양자역학에서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블랙홀이 완전히 검은색으로 보이는 이유는 빛을 비롯한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 때문인데, 완벽한 암흑이라는 개념 자체가 불확정성원리에 위배된다. 양자 세계에서는 암흑조차도 불확실하다. 그리하여 호킹은 블랙홀이 아주 미약하게나마 양자 복사를 방출한다는 혁명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호킹은 블랙홀에서 방출되는 복사가 흑체 복사의 한 형태임을 증명했다. 진공이란 완벽한 무가 아니라 온갖 양자적 현상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는 난장판에 가깝다. 양자이론에 의하면 무의 상태에서도 전자와 반전자가 갑자기 나타났다가 서로 충돌하여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진공조차도 양자적 활동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호킹은 블랙홀처럼 중력장이 엄청나게 강한 곳 근처에서는 전자와 반전자 쌍이 진공 중에서 생성되었다가 하나는 블랙홀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하나는 블랙홀을 탈출할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이때 입자 쌍을 생성한 원천은 블랙홀의 중력장에 함유된 에너지에서 온 것이다. 그런데 두 번째 입자는 블랙홀을 떠난 후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계속 일어나다 보면 결국 블랙홀의 질량과 에너지 그리고 중력장은 서서히 감소하게 된다. 


  이런 현상을 ‘블랙홀 증발’이라고 하며 이 과정에서 방출되는 복사를 ‘호킹 복사’라고 한다. 모든 블랙홀은 수조 년 동안 호킹 복사를 서서히 방출하다가, 이마저 고갈되면 불꽃 속에서 폭발하여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호킹은 또 다른 질문을 제기했다. ‘블랙홀 안으로 책을 던지면 그 안에 들어 있던 정보는 영원히 사라지는가?’ 양자역학에 의하면 어떤 경우에도 정보는 사라지지 않는다. 불구덩이 속에서 책을 태워도 남은 재를 모아서 열심히 분석하고 이어 붙이면 책 전체를 완벽하게 복원할 수 있다. 


  하지만 호킹은 블랙홀 안으로 책을 던지면 그 안에 들어 있던 정보는 영원히 사라지므로 블랙홀의 내부에서는 양자역학의 법칙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양자역학을 옹호하는 물리학자들은 끈이론처럼 진보된 이론을 적용하면 블랙홀 안에서도 정보가 보존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바탕 논쟁을 벌인 후, 호킹은 자신이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하면서 기발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블랙홀 안으로 책을 던지면 정보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호킹 복사의 형태로 방출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희미한 호킹 복사에 담긴 정보를 빠짐없이 긁어모으면 원래의 책을 똑같이 재현할 수 있다. 호킹의 주장이 틀릴 수도 있지만, 그가 발견한 복사가 문제의 핵심인 것은 분명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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