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나온 시간들 Aug 15. 2023

사람에 대한 기대가 삶을 망칠 수도

  주위에 있는 누군가에게 기대를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누군가가 중요하고 가까운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러한 기대가 어쩌면 더 치명적으로 우리의 삶을 망치게 되기도 한다. 


  백수린의 <흰 눈과 개>는 어떤 것보다도 좋았던 아빠와 딸의 관계가 어느 순간 허물어져 버렸고, 그 관계를 회복해 가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처음부터 그와 딸 사이가 이렇게 어긋나 있던 건 물론 아니었다. 8년 전, 그날의 그 일이 있기 전에 그들은 어느 부녀지간보다 가까웠다. 그래 여름 느닷없이 직장을 그만두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겠다고 떠났던 딸이 결혼할 상대를 찾았다고 선언을 하지 않았더라면, 최소한 결혼 상대자를 직접 만나기 전에 소개할 사람에 대한 정보를 미리 언질이라고 해주었더라면. 하지만, 딸은 그에게는 그런 시간적 여유를 전혀 주지 않았다.”


  딸과의 관계가 틀어진 것은 딸에 대한 어느 정도의 기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빠는 딸의 결혼 상대를 외국인이 아닌 남자이길 기대했고, 입양되어 자란 사람이 아니길 기대했고, 너무나 가난하지 않은 사람이길 기대했지만, 그런 기대와는 정반대였기에 그것을 수용하지 못했다. 그로 인해 가장 소중하고 좋았던 그들의 관계가 틀어져 버렸다. 


  “그는 그날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던 딸의 목소리 톤을, 그 말을 하는 동안 미세하게 떨리던 얼굴의 근육을 전부 다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꿈을 꾸고 난 밤이면, 그는 파리한 어둠 속에서 소스라치듯 일어나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을 가눌 길 없어 고통스러웠는데, 그를 배신한 것이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취직해야 한다고 매번 다그쳤던 아들과 달리 하고 싶은 것은 죄다 하게 해주며 오냐오냐 키운 딸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소중한 사람한테 받은 상처이기에 더 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빠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은 자신이 상처를 받았다면, 자신 또한 딸에게 상처를 준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일방적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관계는 상호작용이다. 그가 내게 상처를 주었다면, 나 또한 그에게 상처를 준 것이고, 내가 그로부터 상처를 받았다면, 그 또한 나로 인해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자신 스스로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다른 이가 나에게 준 상처만 인지할 뿐, 내가 다른 이에게 준 상처는 전혀 없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또 한 가지를 깨달아버렸다. 딸은 그에게 사과를 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던 것이 아니라, 그가 사과를 해주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무엇을? 그들의 관계가 틀어진 계기를 제공한 것도, 그의 화가 풀어지기를 기다리지 않고 결혼을 감행하고 떠난 것도, 무엇보다 그에게 상처가 된 그 말을 한 것도 딸이었는데. 분노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덩어리를 이뤄 그의 목을 틀어막았다.”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게 되니, 그 관계의 회복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오직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의 프레임에서 판단을 하니 다른 이의 생각과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 나의 아픔에만 관심 있고, 나의 상처에만 예민할 뿐, 상대의 아픔과 상처는 전혀 인식을 하지 못한다. 그로 인해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되고, 그와의 인연은 그렇게 끝나버리고 만다.   


  “온몸으로 뛰어오르는 생명력. 그리고 그는 너무나도 천진한 개를 보면서 딸이 어째서 그렇게까지 그 장면에 몰두하는지를 알아챈다. 그가 딸에게 보여주려는 것을, 딸아이가 이미 발견했음을. 그러니까 그 개가 세 개의 다리만으로 폴짝폴짝 뛰고 있다는 걸. 개는 다리가 하나 없는 것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떤 끔찍한 일이 있었지만, 그것은 이제 다 아물었으므로, 괜찮다는 듯 남아 있는 세 다리로 그렇게 꼬리를 흔들며 눈밭을 뒹굴었다.”


  부족한 것이 있어도 괜찮다. 가진 것이 많이 없어도 상관없다. 나의 기대에 어긋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존재함으로도 행복하고 즐겁게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45억 년 동안 계속해서 돌 수 있는 것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가 태양에 조금만 더 가깝거나 조금만 더 멀어도, 지구와 태양의 관계는 끝이 나게 된다. 


  누군가에 대한 기대가 그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그 사람과의 관계에도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우리 삶의 일부가 망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보다 중요한 것은 소중한 사람과 오래도록 함께 하는 것이 아닐까? 나의 누군가에 대한 욕심과 기대를 버리는 것이 어쩌면 그러한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기반일지 모른다.     


 


작가의 이전글 당신의 판단과 나의 판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