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인간세편에 보면 남백자기란 사람이 어느 지역에 갔는데 그곳에 엄청나게 큰 나무를 볼 수 있었다. 그 크기가 너무 커서 수레 수 천대가 그 나무의 그늘에 다 들어갈 정도였다. 어떻게 이렇게 큰 나무가 가능한지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그 나무의 가지는 너무 구불구불하여 집 짓는 재목으로 쓸 수도 없었고, 밑동은 속이 텅 비어서 관이나 널빤지로도 쓰기가 불가능했다. 그 커다란 나무를 자세히 다 살펴보고 나서 남백자기는 이렇게 말한다.
“此果不材之木也(차과부재지목야)
以至於此其大也(이지어차기대야)”
이는 “이 나무는 재목이 될 수 없는 쓸모없는 나무로구나. 그렇지만 그 쓸모없음이 이 나무를 이렇게 큰 나무로 자라게 한 것이구나”라는 뜻이다.
만약 그 나무가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것이 많았다면 그렇게 커다랗게 자랄 수 없었을 것이다. 더 자라기도 전에 재목으로 잘려 나갔을 것이다. 남백자기가 본 나무는 쓸모 있는 나무를 찾는 이들에게는 전혀 유용하지 않았다. 그런 관계로 그 나무는 어마어마하게 크게 자랄 수 있었다. 나무를 재목의 용도로만 본다면 그 커다란 나무는 진정 쓸모없기에 잘라내 장작으로나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그 나무는 비록 집 짓는 곳이나 가구 만드는 것에는 쓸모가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나무의 용도를 재목으로만 보기에 그렇다. 그 나무를 다른 시야로 볼 수는 없는 것일까? 내가 보기엔 그 나무의 쓸모없음이 엄청나게 쓸모 있음이 된 것 같다. 그 나무가 어디에 쓸모 있는 것일까? 그 나무는 엄청나게 커지면서 어마어마한 나뭇잎이 있었을 것이다. 그 엄청난 나뭇잎은 우리에게 많은 양의 산소를 제공해 준다. 수백 그루의 나무가 해야 하는 일을 그 나무 혼자서 다 해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무더운 여름 그 나무는 커다란 나무 그늘을 제공해 지나가는 많은 사람의 휴식처를 제공해 주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새들이 그 커다란 나무에서 집을 짓고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존재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없다. 어디까지가 쓸모 있는 것이고 어디까지가 쓸모없는 것일까? 누가 그러한 기준을 만드는 것인가? 누가 나은 사람이고 누가 그렇지 않은 사람일까? 무슨 기준으로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준으로 무엇을 판단한다면 그 또한 다른 이로 하여금 그만한 판단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존재는 시간에 따라 변한다. 현재의 존재가 나중에 시간이 흘러 어떠한 존재로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과거의 존재가 항상 그 모습으로 오늘에 이른 것이 아니다. 지금 현재의 그 모습이 미래의 그 모습으로 변하지 않은 채 그 상태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선한 사람이 악한 사람으로 변할 수도 있고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
내가 지금 보는 어떤 존재를 하나의 시야만을 가지고 현재의 모습을 판단하는 것은 자신의 시야가 그만큼 좁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판단하는 그 사람보다 판단되어지는 그 사람이 나중에 시간이 지나 훨씬 더 나은 모습으로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어떤 것을 판단하는 데 있어 부족함이 없는지 돌아보는 것이 우선이다. 어떤 대상이 쓸모 있는지 쓸모없는지 생각하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 자신이 쓸모없다고 생각하여 버린 것이 나중에 정말로 귀한 것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될지도 모른다. 존재는 그 자체로 소중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