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생각이 항상 옳다고 확신하는 것에는 스스로가 모르고 있는 이면이 존재한다. 우리의 세계는 우리의 인식에서 비롯된다. 우리의 인식은 단순한 하나의 고정된 생각에 기반을 두어서는 더 이상의 발전이 없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겉으로 보아서는 멋있게 보일지는 모르나 이는 스스로의 발전을 막아서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자신에 대해 확신을 하면 할수록 자신의 생각이 옳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관철시키고자 하기에 더 깊은 자신의 늪으로 빠져들게 되지 않을 수 없다. 스스로 자신을 헤어 나오지 못하는 수렁으로 밀어 넣은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생각은 전혀 그의 귀에 들어오지 않게 되고 그 사람을 진정으로 아껴서 해주는 충고마저 잔소리로 여길 뿐이다.
“여러 가지 신념을 가져본 적이 없는 자나 최초의 신념에 집착하는 자는 절대로 자신의 신념을 바꿀 수 없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낙오된 문화를 대표한다. 이런 사람은 경직된 벽창호이며, 가르치기 어렵고 유연성이 없는 영원한 비방자이며 자기 의견을 관철하기 위해서 온갖 수단에 호소하는 무법자이다. 그것은 다른 의견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니체)”
자신이 옳은지 그렇지 않은지 항상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를 행하지 못하는 순간 그는 더 이상의 세계와는 스스로 단절을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확신에 가득 찬 상태로 본인이 바라는 것을 무조건적으로 희망하는 것은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이 부족하기에 어쩌면 유아기적 안목만을 유지하고 있을 따름이다.
“위대한 인간은 필연적으로 모든 일에 회의를 품는 사람이다. 모든 종류의 확신에 사로잡히지 않는 자유로움이 그의 의지의 강함에 포함되어 있다. 신념을 갖기를 바라는 일, 긍정에 있어서건 부정에 있어서건 어떻든 무언가 무조건적인 것을 바라는 일은 약한 마음의 증명이다. 그런데 모든 약한 마음은 의지의 약함인 것이다. 신념에 가득 찬 사람은 필연적으로 나약한 인간인 것이다. 따라서 ‘정신의 자유’, 다시 말해서 본능으로서의 불신은 바로 위대함의 전제이다. (힘에의 의지, 니체)”
자신에 대해 확신하는 모습이 어떤 면에서 보면 주관이 있고 추진력이 있어 보일지 모르나 그 이면에는 자신의 확신에 의한 노예로 전락할 수 있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자신의 생각에 갇혀 오로지 그로 인한 삶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주 공간에 있는 어떤 존재라도 항상 그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없다. 시간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위치와 성질과 그 모든 것은 흐름에 따라 모습을 바꾸어야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우리의 신념이나 생각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판단이 시간이 지나면 옳지 않을 수 있다. 확신은 시간의 함수로 생각해야만 한다.
순간적으로 자신에 대해 확신할 수는 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확신의 잘못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의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는 자신의 확신의 이면에 존재하는 스스로의 세계에 갇혀 버리고 마는 존재에 머무르게 되고 말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확신을 언제든지 과감하게 벗어버릴 용기가 필요하다. 이는 주관이 없는 자가 아닌 진정으로 자신마저 버릴 줄 아는 용기 있는 자만이 가능하다. 자신의 내적 성장은 자신을 버릴 수 있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일지 모른다.
자신의 확신만을 의지하는 자는 성장을 모르는 자, 성장을 두려워하는 자, 현재에 안주하고자 하는 자일 수밖에 없다. 스스로를 확신하는 것은 겉으로는 강한 자 같아 보이나 실은 고집만을 내세우는 독선에 사로잡힌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 자신의 세계만이 전부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자신이 스스로에게 자유로울 때 진정한 성장이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확신을 내려놓아야 그 이면에 존재하는 것도 사라질 수 있다. 사고에 있어 부드러운 자가 그래서 단단한 자보다 더 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