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에 보면 수많은 우화로 가득하다. 그런데 그러한 우화 중에는 우리의 상식을 초월한 말도 안 되는 만화 같은 이야기들이 수없이 많다. 예를 들어 장자의 제1편 소요유(逍遙遊)에는 다음과 같은 우화가 나온다.
北冥有魚 其名爲鯤。鯤之大 不知其幾千里也。化而爲鳥 其名爲鵬。鵬之背 不知其幾千里也 怒而飛 其翼若垂天之雲。是鳥也 海運則將徙於南冥。南冥者 天池也。
齊諧者 志怪者也。諧之言曰 鵬之徙於南冥也 水擊三千里 摶扶搖而上者九萬里 去以六月息者也。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어 그 이름을 곤이라고 하는데, 그 크기가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그것이 변화해서 새가 되니 그 이름을 붕이라 하며 이 붕의 등 넓이도 몇천 리나 되는지 알지를 못한다. 이 새가 한번 기운을 내서 날게 되면 그 날개는 마치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을 정도다. 이 새는 바다 기운이 움직일 때 남쪽 바다로 옮겨가려고 하는데 남쪽 바다란 천지를 말한다. 제해란 기괴함을 적은 것으로 거기에 이런 말이 있다. “붕새가 남쪽 바다로 옮겨갈 때에는 물결을 치는 것이 삼천리요, 회오리바람을 타고 구만리나 올라가 육 개월을 가서야 쉰다.”라고 하였다.
곤이라는 북쪽 바다에 살고 있는 물고기의 크기는 몇천 리나 된다고 하는데 사실일까? 그렇게 커다란 물고기가 새로 변했는데 그 새의 크기도 몇천 리나 된다고 하는데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장자는 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통념을 깨기 위해서이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마음을 비우고 내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나 편견을 깨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것에 모든 것을 담으려 한다면 우리의 세계는 그만큼 작은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즉 우물 안 개구리가 보는 세계가 작듯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견과 통념이 고정되어 버리면 그만큼 우리가 볼 수 있는 세계가 한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장자는 이것을 깨고 싶은 것이다. 더 커다란 세계로 나가기 위해서, 더 나은 나의 모습으로 발전되기 위해서 우선 해야 할 것은 지금 가지고 있는 통념을 깨는 것이다.
장자의 제1편 제목은 소요유인데 왜 이러한 이름을 지었을까. 이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변하지 않는 통념과도 무관하지 않다.
소요유(逍遙遊)란 어슬렁어슬렁 놀며 다닌다는 뜻이다. 이는 삶의 온전한 자유를 말함이다. 세상의 여러 가지에 집착하거나 연연해하지 않고 속세를 초월한다는 의미이다. 이를 위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을 따라서는 안 된다. 삶의 조그만 것에 매여 힘들게 살아가는 이유는 사고의 자유함과 유연함이 없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삶을 위해서는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사고의 패턴을 깨나가야 한다. 그러한 한계를 넘어서 더 나은 모습을 나아가는 것이 우리가 현재 존재하는 이유라 할 수 있다.
장자가 만화 같은 말도 안 되는 우화를 사용하는 이유는 어린아이의 사고의 유연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하고 싶어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어린아이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만화를 보아도 그것에 대해 반감이 그다지 없다. 생각이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알면 알수록 우리의 생각에 고정되거나 집착해서 굳어진 통념에 사로잡혀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통념이 우리의 삶의 자유를 방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장자가 바라는 것은 바로 삶의 자유로움이다. 어디에 연연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생각의 자유로움이다. 이를 위해 말도 안 되는 우화를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가 말하는 우화를 생각해보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삶의 자유로움이나 생각의 자유를 가지기 힘든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