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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온 시간들 Oct 18. 2021

절망할 필요 없다

절망은 스스로 느끼는 감정이다. 외부의 요인으로 인해 또는 자신으로 인해 나타나는 마음의 울림이다.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 생기는 반응이다. 원하지 않은 일들이 나에게 닥쳐와서 아픔을 주기에 생기는 감정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모든 감정이 별로 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사실을 아직 모르기에 절망할 뿐이다. 절망할 필요가 전혀 없다. 진정으로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나의 삶을 파괴할 정도로 심각한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나의 삶은 파괴하는 것은 오로지 죽음밖에 없다.


  “바로 절망의 괴로운 실체다. 끝이 내면으로 향하는 이 극심한 고통으로 언제나 우리는 무기력한 자기 파괴에 더욱 몰두한다. 절망한 사람은 절망으로 자기 파괴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위안이 아니라 고통을 느낀다. 그 고통으로 앙심은 커져가고 이를 악문다. 과거의 절망을 현재 끝없이 쌓아가며 자신을 삼켜버릴 수도,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도, 자신을 없애버릴 수도 없어 절망한다. 이것이 절망이 쌓여가는 공식이다. 자아 때문에 절망이라는 병이 들어 열은 높이 올라간다. (죽음에 이르는 병, 키에르케고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게 되는 경우는 대부분 절망의 극심한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삶의 몸부림이다. 선택을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다는 것에 삶의 아픔이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진정으로 절망해야 하는 것이 무엇이 있는 것일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떠났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가 있는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내가 사랑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나에게 어떤 사람이 아프게 했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가 있는가. 그 아픔이 나의 인생의 전체를 완전히 바꾸어 놓는가. 주위에 일어나는 일들이 나를 힘들게 한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가 있는가. 그러한 일들이 영원히 계속된다고 생각하는가. 그러한 일들을 뒤집어 놓을 만한 힘이 나에게는 없는 것인가. 


  아니다. 나의 삶이 다른 사람이나 다른 일들로 인해 좌우된다면 그것은 나의 삶이 아니다. 내가 그것의 노예에 불과하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나의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오지 나밖에 없다. 어떤 사람이나 외부 요인에게 의지하고 기대하고 희망하는 것은 나의 삶을 그 사람이나 그것에게 의탁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내가 왜 그러한 것들에 나의 삶을 의탁해야 하는 것인가. 그렇게 할 필요나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절망할 필요 또한 전혀 없다. 나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그것을 해결해야 하는 것은 나밖에 없다. 그 누구에게 나의 문제를 도와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지 않겠다는 나약한 마음의 발로일 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벗어나고자 하는 것, 주위의 일이나 외부환경에서 탈피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그러한 것에 너무 의지해오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절망이라는 것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나의 삶의 책임은 오로지 나만의 것이라는 사고를 한다면 절망이라는 단어 자체가 사전에 존재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나의 삶에는 아예 절망이 설 곳을 없앨 수도 있다. 다른 이들이나 다른 것에 기대하거나 바라지만 않아도 내가 느끼는 절망의 반 이상은 줄어들 수 있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오로지 나밖에 없다는 것은 사실을 넘어선 진리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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