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허무는 죽음에서 비롯된다. 우리의 삶은 영원할 수가 없다. 이러한 허무를 초월할 수는 없는 것일까? 내가 생각하기에는 살아 있을 때 그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는 방법이 하나요, 우리 인간의 존재는 그렇게 엄청난 것이 아니기에 죽음도 삶이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다른 하나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인간에게 있어 마음은 사고와 항상 함께 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저 슬퍼하는 것이 전부가 아닐까 싶다. 슬퍼서 울다가 지쳐 더 이상 울지 못할 정도가 될 때까지 그냥 슬퍼하는 것이 나로서는 전부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招魂(초혼)”이란 사람이 죽었을 때, 그 혼을 소리쳐서 부르는 것을 말한다. 북한의 평안북도 지방에는 사람이 죽었을 경우 죽은 사람이 살아있을 때 입었던 윗옷을 가지고 지붕이나 마당에서 왼손으로는 옷깃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옷의 허리 부분을 잡은 뒤 북쪽을 향해서 죽은 이의 이름을 세 번 부르는 풍습이 있었다. 죽은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애달픔이 있었기에 그랬던 것이 아닌가 싶다.
<초혼>
김소월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아무리 사랑하고 나의 마음에 가득했던 사람도 언젠가는 나를 떠난다. 내가 먼저 떠날 수도 있다. 한번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 엄연한 자연의 섭리이다. 불멸은 우리 인간에게는 의미 없는 단어이거나 추상적인 관념일 뿐이다.
옆에 있을 때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해주고 싶은 말 하나 제대로 못 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왜 지금 옆에 있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며 살고 있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 사람이 영원히 나와 함께 할 것 같기에 그렇다.
로마제국 시대에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이 있다. 이는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뜻인데, 옛날 로마 원정군이 승리를 한 후 개선하는 과정에서 하는 말이었다. 오늘의 승리가 있지만, 그 승리는 영원할 수 없으며 언제 죽음이 다가올지 모르니 겸손하게 승리를 생각하라는 뜻이다.
이 말은 또한 나바호 인디언에도 전해지는 말인데 그들은 전통적으로 “네가 세상에 태어날 때 너는 울었지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그런 삶을 살아라”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에게 인생은 그래도 살아볼 만했기에 이런 생각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죽음을 항상 기억하고 있을 때 사랑했던 사람이 떠나가도 그리 많이 후회하지는 않으리라.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이 소중한 사람이란 걸 잊는다면 우리는 그가 떠나갔을 때 그의 이름을 세 번이 아닌 서른 번을 불러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죽은 사람과 살아남은 사람 사이의 공간은 뛰어넘을 수가 없다. 그래서 시인은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존재는 없다. 삶은 지금 여기 있을 뿐이다.
죽음을 긍정할 수가 있을까? 나는 자신이 없다. 받아들일 자신도 없다. 그러기에 그냥 오늘 최선을 다하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