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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온 시간들 May 28. 2022

내게 이르지 않은 슬픔

아직은 나에게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언젠간 느끼게 될 슬픔이 있습니다. 그것을 거부하고 싶지만 거부할 수도 없고,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도 없음을 너무나 잘 압니다.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알 수도 없고, 과연 내가 이겨낼 수 있을지 두렵기도 합니다. 


  솔직한 심정은 그 슬픔이 나에게 오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 슬픔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다. 나의 존재가 사라진다면 가능하겠지요. 그렇기에 운명은 아주 얄궂은 보기 싫은 존재라는 것을 느낄 뿐입니다. 


  돌이켜 보면 슬펐던 순간이 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한 시간들을 어떻게 견디어내고 버티어 냈는지 지금 생각해 봐도 스스로 이해하기 힘들기도 합니다. 그만큼 슬픔의 깊이가 컸던 것 때문일까요?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을 제일 싫어합니다. 그 말은 고생을 하지 않은 사람이 하는 말이란 것을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진정으로 고생을 한 사람은 그 말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 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슬퍼도 슬퍼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어차피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니 내 것이 없고, 이 세상을 떠날 때도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할 것이니 아쉬울 것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러한 생각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나의 영혼인가 봅니다. 


  그러한 슬픔을 신의 뜻이라고 생각해야 할까요? 아니면 모든 것의 원인은 나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니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나로부터 말미암지 않는 것도 있으니 그것은 어떻게 해석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감당할 수 있는 슬픔만 신이 허락했으며 좋겠습니다.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신은 자비로운 존재라고 믿으려 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줄 수 있는 그러한 존재로 의지하려 합니다. 


  많이 슬펐던 사람들이 생각납니다. 나보다 훨씬 커다란 슬픔을 겪었던 사람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갔는지도, 어떻게 세월을 견디고 살아냈는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들도 감당했기에 나도 감당을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 감당해야 하는 시간이 싫은 것은 솔직한 마음입니다. 먼저 그러한 시간을 감당했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나도 버티어 내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아직 이르지 않은 슬픔을 가지고 왜 벌써부터 그러냐고 물을지도 모릅니다. 저도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왜 진작에 그런 생각을 하는지 저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현재를 살아가지 못하는 제 자신이 무지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지금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면 그 슬픔이 다가왔을 때 조금은 덜 힘들 것이라 생각해서 그러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내게 이르지 않은 슬픔이 존재하는 것은 삶은 한 번 뿐이니 그 모든 것을 경험해 보라고 주어지는 것일까요? 아니면 자연의 순리이니 예외가 없기 때문인 것일까요? 


  이제는 마음의 문을 열고 조금씩 더 많은 것을 받아들이려 합니다. 그 어떤 것도 거부하지 않은 채, 두려워하지 않고, 고개를 꼿꼿이 들고, 어깨를 펴고, 눈에 힘을 주어가며, 다 받아들이는 준비를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제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저의 약하디 약한 영혼에서부터 나오는 눈물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아직은 내게 이르지 않은 슬픔을 그렇게 준비할 수밖에는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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