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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온 시간들 Jun 19. 2022

세월은 반복되지 않는다

평생을 치열하게 살아가지만, 세월이 흘러 집에 남아 있는 사람은 없다. 부모도 자식도 가족들 하나씩 그렇게 모두들 떠나가 버리고 결국 홀로 되고 마는 것이 인생인 것일까? 김인숙의 <빈집>은 27년을 가족을 위해 살아온 중년의 삶을 돌아보게 해주는 이야기이다. 


  “분명한 것은 지나간 세월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으리라는 사실이었다. 넉넉지 못했던 삶을 등에 지고 가파른 언덕을 오르듯 땀을 흘렸던 기억이나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던 기억들뿐만 아니라 입안에서 흑설탕이 녹는 것처럼 달콤하고 목마르던 기억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이들이 자라나는 것을 보며 느꼈던 매 순간의 전율 같던 행복, 내 집을 장만한 첫날 거실 바닥을 닦다가 젖은 자국이 자신의 눈물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의 거의 고통에 가까웠던 기쁨, 어렸던 아이들을 이고 지고 피서를 떠났던 계곡에서 물난리를 만났을 때 느꼈던 공포와 함께 내질렀던 비명, 그리고 절대로 놓을 수 없었던 손과 손의 기억. 그 모든 것들은 이제 지나간 세월들 속에 있으며 다시 다가오지 않으리라. 삶은 계속되겠지만 그것은 더는 전율도 공포도 아니리라. 서운하고 허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느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편안한 느낌이라는 쪽이 더 옳았다.”


  우리는 왜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던 것일까? 무엇을 위해  그토록 치열하게 살았던 것일까? 오는 사람은 오고 가는 사람은 가는 것이 인생인 걸까? 물론 오랜 세월 행복하고 의미 있는 많은 순간들이 있었지만, 그러한 순간은 그때뿐인 것일까? 그만큼 좋은 시간들이 있었기에 더 이상의 기쁘고 좋은 순간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일까? 


  “개는 교통사고로 죽었다. 남편이 사람들에게 의기양양하게 농담을 하고 있는 동안 목줄에서 풀려난 개가 차도로 뛰어들었던 모양이다. 남편이 죽은 개를 품에 안은 채 돌아왔다. 개도 남편의 몸도 피투성이였다. 그녀는 비명을 질렀고, 잠깐 공황 상태에 빠져 이게 슬퍼해야 할 일인지 놀라워해야 할 일인지 분간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역시 아무것도 분간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걸 집 안으로 끌고 들어오면 어쩌느냐고 악을 쓰기 시작했다. 남편은 한동안 꼼짝도 않고 현관에 서 있다가 마치 내던지듯이 죽은 개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걸 거기다가 내려놓으면 어쩌느냐고 그녀가 다시 악을 썼지만, 남편은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그가 신발을 신은 채로 안으로 들어와 쓰레기봉투를 찾았다. 남편이 죽은 개를 쓰레기봉투 속에 밀어 넣기 시작했다. 개는 한 번에 들어가지 않았다. 봉투 바깥으로 삐져나온 다리를 남편이 봉투 속으로 쑤셔 박았다. 그러는 동안 남편의 몸은 피범벅이 되었고, 현관 바닥에도 피가 뚝뚝 떨어졌다.”  


  자신의 입장에서만 상대를 바라보기에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인지 모른다. 나의 존재를 그 사람의 마음에서 찾을 수 없기에 그렇게 떠나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함께 함이 그토록 어려움은 각자의 자아가 크기 때문이 아닐까? 나를 희생함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그렇게 쉽지 않았음이 결국 빈집을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밀이 사랑을 키웠다. 그가 세상의 한구석에서 세상 전체를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특히나 아내는 모르는 것이다. 그는 세상 한가운데에 있었고, 또 무덤 한가운데에 있었다. 죽은 자의 목소리가 가끔 들렸다. 그것은 평생을 혼자 살다가 가난하게 늙어 죽은 고모부의 목소리였다. 

뭐, 이만하면 잘 죽은 거 아니냐. 그 와중에도 열쇠들은 분주히 서로의 몸을 부대껴가며 교미를 하고 번식을 하고 있었다. 세계가 세계를 무한 확장했다. 그가 영천 집에 머물 때마다 보름달이 환했다. 세상에서 가장 풍성한 고독을 가진 한 남자의 밤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곳이 그가 존재하는 장소일 뿐이다. 집이란 어쩌면 허상의 공간일 뿐 마음도 떠나면 다른 공간에 자신의 마음을 숨겨놓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각자 그러한 공간이 존재하기에 집은 그렇게 텅텅 비어가는 것이 아닐까? 세월은 반복되지 않기에 아름다운 시간을 만들고자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자신만의 세계를 고집하기에 그 세계에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밖에 없다. 반복되지 않는 세월 속에서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위안을 삼아야만 하는 것일까? 그러한 위안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현명한 것일까? 빈집은 영원히 채워지지 못한 채 결국 나중에 허물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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