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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온 시간들 Sep 16. 2022

삶의 끝에서


푸른 꿈을 위해 열심히 살아왔지만, 삶의 어느 골목에서 우리는 극한의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더 이상 헤어 나오지 못할 삶의 한계와 마주했을 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고 모든 것에서 떠나고 싶은 마음 간절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최인호의 <깊고 푸른 밤>은 모두가 그렇듯이 인생의 커다란 목표를 위해 자신이 꿈꾸었던 아름다운 세계를 위해 앞으로만 달려왔지만, 무언가 모를 올가미가 더 이상 달려 나가지 못하게 그의 발목을 잡는 어떤 한 인간의 극한의 생의 모습을 이야기해 주는 소설입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한시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혹사한 탓으로 신경이 팽팽한 바이올린의 현처럼 끊어져 버린 모양이라고 자위해 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참을 수 없는 분노는 더 이상 긴장과 자제로써도 눌러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분노는 그의 입을 뛰쳐나오고, 그의 손끝을 불수의 근육처럼 움직였다. 술좌석에서 그는 술만 마시면 마주 앉은 사람들과 싸웠고 어떤 때는 병을 깨고 술상을 뒤집어 엎어버리기도 했었다. 그가 여행을 떠나온 것은 그런 모든 분노의 일상생활에서 도망쳐 온 것이었다.”


살아간다는 것은 행복을 위해,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매일같이 최선을 다해 달리는 그다음 날에도 또 달리는 단거리이자 장거리 선수와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생리적으로 한계를 가지고 있기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어느 순간에는 삶의 무게에 지쳐 쓰러지기 마련입니다. 예전엔 전혀 예상하지도 못하고 그러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리라 생각하지 못했지만, 인생이라는 짧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우리에게는 어느 순간 감당치 못하는 삶의 무게가 우리를 짓누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삶은 그러한 여정의 연속일 수밖에 없기에 그 순간을 지나간다면 다시 자유로운 시간을 마주할 수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제서야 줄곧 그의 마음속에 끓어오르던 분노의 불길이 서서히 꺼져가는 것을 보았다. 파도에 의해서 밀려온 낯선 뭍으로의 망명이 그의 분노를 잠재운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가 살아온 모든 인생, 그가 보고 듣고 느꼈던 모든 삶들, 그가 소유하고 잃어버리고 허비했던 명예와 허영, 그가 옳다고 믿었던 정의와 법, 때로는 성공하고 때로는 배반당했던 그의 욕망, 끊임없이 추구하던 쾌락과 성욕, 그가 한때 가지고 버렸던 숱한 여인들, 그 모든 것들로부터 무참하게 얻어맞고 마침내 처절하게 패배당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처절하게 패배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의 분노는 참다랗게 재를 보이며 소멸당했다. 이제는 원한도, 증오도, 적의도, 미움도, 아무것도 가질 이유가 없었다. 그는 딱딱한 바위의 표면 위에 입을 맞추며 그를 굴복시킨 모든 승리자들에게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이젠 정말 돌아가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는 너무 지쳐 있었으므로 그 누구에게든 위로받고 싶었다.”


지나고 나면 별것 아니었다는 사실, 모든 것은 다 이유가 있고, 시간은 정직하다는 진리가 그러한 삶의 고비를 넘긴 이들에게 봄날의 따스한 햇빛처럼 주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인생이 무엇인지, 삶이 어떠한 것인지는 그러한 고비를 넘긴 이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인지도 모릅니다.


“우린 절대로 죽지 않아. 봐라, 저 꿈틀거리는 검은 것이 무엇인지 아니. 그건 바다야. 태평양이야. 저 바다는 네가 돌아가려는 나라의 기슭과 맞닿아 있지. 우린 틀림없이 돌아가게 돼. 길을 찾을 수 있을 거야. 날이 밝으면 우린 돌아갈 수 있게 돼. 로스앤젤레스는 멀지 않아. 그곳에서 비행기를 타고 당장에라도 저 바다를 건너갈 수 있을 거야.”


포기하지 않고 길을 걸어갈 때 최종적인 목적지에 도달하듯, 그 순간순간을 어떻게든 살아내는 이들에게 조그마한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오리라는 희망을 가슴속에 새기고 오늘 다시 묵묵히 길을 걷는 것만이 최선이라는 것은 삶의 끝에 도달한 자가 알게 되는 평범한 진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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