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의 시가 소나기로 내렸다
다행이다
놀라운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녀가 바닥에서 먼지를 툭툭 털며 천천히 일어났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흔들리지도 않았다.
자, 집에 가자 등에 업힌 아기에게 백 년을
참다 터진 말처럼 입을열었다.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중에서 <다행이라는 말> 천양희/창비
요즘은 많이 사라졌지만 고무다리를 한 채 길바닥을 기어 다니거나 작은 바구니 앞에 두고 머리를 땅바닥에 깊이 조아린 사람들이 있다. 강보에 싼 아이를 달래며 추운 겨울에 길바닥에서 구걸하는 여인도 있다.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양미간을 찌푸린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고무다리가 가짜라서 사람들이 없을 때면 벌떡 일어난다거나 일이 끝나면 고급 승용차를 타고 사라진다는 등의 루머 때문만은 아니었다. ‘저러고 있을 시간에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지’ ‘사지가 멀쩡한 사람이 일은 안 하고, 참 쉽게 돈 벌려 한다’라며 일축한 뒤 자리를 뜨기 바빴다. 혀를 끌끌 차면서.
시인은 어느 날 환승역 계단에서 구걸하는 여인을 본다. 팔다리가 뒤틀려 온전한 곳이 하나도 없는 그녀의 등에는 아기가 업혀 있었다. 섣부른 동정조차 조심스러워 눈을 질끈 감고 그 자리를 벗어난다. 하지만 여자와 아이가 눈에 밟히고 마음에 걸렸다. 어느 날 다시 환승 옆 앞을 지나다가 시인은 눈을 의심할 장면을 목격하고 만다. 여자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몸을 툭툭 털고 일어나더니 아이에게 ‘이제 집에 가자’라고 말문을 연 것이다. 마치 그날의 근무를 마친 직장인이 퇴근 준비를 서두르듯이.
시인이 봤던 광경을 내가 봤다면 어땠을까?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 믿기지 않아 눈동자가 휘둥그레 졌을 테고 이어 여인에게 속은 데 대한 분노와 배신감에 휩싸였을 것이다. “역시 그랬어. 적선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라며 돈 한 푼 건네지 않은 내 판단이 옳았음을 재차 확인했을 것이다. 아까운 돈을 낭비하지 않았다는 데서 오는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시인은 어땠을까. 여자와 아이를 걱정했던 마음에 찬물을 끼얹은 그녀의 행동으로 인해 일말의 동정심마저 싸늘하게 식어버렸을까? 여자에게 속은 것이 분하고 화가 났을까? 그렇지 않았다. 시인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돌덩이 하나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속에서 ‘다행’이라는 단어가 섬처럼 떠올랐다. 몸이 아프지 않아서 다행이고 아이를 제대로 돌 볼 수 있는 건강한 몸의 엄마임에 다시한 번 안도했다. 아기 엄마의 무탈함에 걱정을 내려놓은 시인은 두부값으로 마음을 전한다. 그녀가 전한 것은 두부값보다 더 너른 마음이었고 얼른 집으로 가서 따뜻한 한 끼 밥을 먹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었다.
‘다행’ 이라니! 그 순간에 ‘다행’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인 그 장면만큼이나 생소했다. 시인이 아니었다면 ‘다행이다’라는 말을 이럴 때도 쓸 수 있다는 사실은 영원히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은 정말 이럴 때 써야 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월급이 올라서 ‘다행’이고, 집을 넓혀서 ‘다행’이고 내 탓이 아니라서 ‘다행’ 이 아니라 타인의 안위를 확인하고 안도의 숨으로 터져 나오는 말이 ‘다행’ 이어야 하는지도.
아프지 않아서 다행이다. 당신이라서 다행이다. 잘 지내고 있어서 다행이다. 수많은 ‘다행이다’라는 말속에는 깊이 안도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그 말이 나오기 전까지의 걱정과 불안한 한숨도 배어 있다. 내 것을 빼앗기지 않아 ‘다행’이고 남의 것을 조금 더 뺏어 올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안심하는 세상이 ‘다행’의 의미마저 퇴색시켜 버렸다.
작은 것에 분노하느라 정작 시멘트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고 구걸하는 여자의 처지에 대해서는 공감하지 못했다. 똑같이 두 눈과, 두 귀가 있고 하나의 심장이 있을 텐데 마음이 가는 방향은 너무 달랐다. 차갑게 굳은 시멘트 바닥처럼 싸늘하게 식어버린 내 마음이 오늘따라 유난히 부끄럽다.
한 편의 시가 내 가슴에 소나기로 내린 오후. 이 시를 읽은 건 정말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