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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인 마음여행자 Nov 02. 2022

작고, 동그랗고, 차가운 아이들의 머리를-이태원 참사

너와 나로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

‘다행히’ 우리 집 아이들은 모두 집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라는 부사는 다음 문장을 읽고 나면 결코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밤, 서울 한 복판에서 백오십 명이 넘는 아이들이 깔려 죽었다…


새벽에 카톡이 울렸다. 동생이 보낸 거였다. ‘애들은 다 괜찮지?’ 비몽사몽간에 무슨 말인가 싶어 갸우뚱하는 사이 다음 카톡이 올라왔다. ‘애들 이태원 안 갔지? 뉴스 봤어?’ 잠이 확 달아났다. 바로 핸드폰을 집어 들고 뉴스를 검색했다. 어마어마한 인파, 아수라장이 된 이태원 거리, 구급차, 소방대원, CPR, 등의 이미지와 소리가 제 멋대로 떠 다니고 있었다. 핼러윈 축제를 즐기기 위해 모여든 청춘들에게 닥친 날벼락이었다. 사망자의 대부분은 10대, 20대였다. 꽃 같은 아이들이 채 피기도 전에  떨어졌다.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았다.


2014년 4월이 떠올랐다. 8년 전에도 아이들이 죽었다. 시퍼런 바닷물이 아이들을 삼켰고 부모들의 시계는 2014년 4월에서 더 이상 흐르지 않았다. 두 번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 거라 다짐했고 약속했지만 이번에도 아이들이 죽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거실에서 방으로, 방에서 주방으로 하릴없이 서성 거리다가 탁자 위에 놓인 책이 눈에 들어왔다. 손보미 작가의 단편 소설집이었다. 책장을 펼치고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첫 작품 <담요>를 읽다가 기어이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담요>의 서사가 이태원의 참상과 겹쳐졌기 때문이다.


‘나’는 작가로 소설의 성공에 도취해 있었다. 친구 ‘한’의 직장상사를 모델로 한 소설이었다. 하지만 ‘한’은 아들을 잃은 직장 상사의 일을 소재로 사용했다는 사실에 분노해서 ‘나’와 절교한다. 2년 후 ‘한’의 장례식장에서 ‘나’는  ‘한’의 이야기 속에서 등장하던 직장상사 ‘장’을 만나게 된다. ‘장’과 마주한 그는 소설을 쓰기 위해 봤던 예전의 자료사진을 다시 꺼내 본다. 수도 없이 봤을 사진이지만 처음 보는 듯한 사진 한 장 앞에서 ‘나’는 오열하고 만다. 이후 ‘나’는 더 이상 소설을 쓸 수 없게 되고 수면제 없이 잠들지 못한다. 어느 날 ‘장’에게서 연락이 오고 그는 자신의 얘기를 ‘나’에게 들려준다.


‘장’의 아내는 아들을 낳고 얼마 후 지병으로 죽고 아들은 혼자서 모든 것을 알아서 하는 아이로 자란다. 어느 날 ‘장’은 아들이 좋아하는 락밴드 공연 티켓을 생일선물로 준비한다. 어렵게 구한 맨 앞 좌석에 앉아서 부자는 함께 공연을 관람한다. 하지만 첫 곡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무대로 난입한 괴한의 총기난사로 밴드 멤버 전원이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난다. 곧이어 앞 좌석에 있던 아들이 갑자기 무대로 뛰어들고 ‘장’은 괴한의 총탄에 아들이 쓰러지는 장면을 무기력하게 바라보는 아버지가 되고 만다. 남은 건 아들이 떨어뜨린 담요 한 장이 전부였다. 경찰이었던 ‘장’은 아들을 위해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아들의 죽음 후 ‘장’은 아들의 담요를 몸에 지니고 다니며 심야 순찰에 강박적으로 집착한다. 어느 추운 겨울밤, 순찰 중에 우연히 술 취한 어린 부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아들의 담요를 떨고 있는 어린 부부에게 덮어준 후 그 작고 동그랗고 차가운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한’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장’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장’의 실존을 마주한 이상, 더 이상 그럴 수 없음을 깨닫는다. 관념과 추상으로만 존재하던 사람이 물리적이고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허겁지겁 찾아본 예전의 자료 사진 속에서 비로소 ‘장’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 건 그래서였다. 아비규환이 된 공연장에서 자식을 잃고 무너진 아버지 ‘장’을 그제야 알아본 것이다.


소설 속에서 ‘나’가  마음대로 서사를 부여하고 세팅한 ‘장’에 대해 대중과 평단은 열광했다. 소설이 완성되는 것과 동시에 ‘장’의 캐릭터는 ‘나’의 마음속에서 지워질 대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현실의 ‘장’은 ‘그날 공연장에 가지 않았다면, 앞 좌석에 앉지 않았다면’과 같은  수많은 ‘~하지 않았다면’을 상상하며 자책감에 괴로워했다. 아들의 분신인양 담요를 부여잡고 간신히 삶을 지탱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이태원도 잊혀지고 죽은 아이들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질 것이다. 기사 한 줄 속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담요> 속 ‘장’과 마찬가지로 저마다가 쓴 소설의 캐릭터로 재구성되거나 여기저기 떠도는 가십거리로 전락할 수도 있다, 카더라 통신에 의해 소비되는 ’ 누군가’의 이야기로 축소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의 뒤늦은 자각처럼 이태원에서 숨진 아이들은 실체 없는 추상이 아니다. 어린 부부가 한 따뜻한 말이 ‘장’ 에게 닿고 ‘장’의 말이 다시 ‘나’에게로 가서 새로운 이야기가 되듯이 우리 삶은 그렇게 너와 나로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 왜 하필 그날, 거기에 있었냐는 비난은 수재로 숨진 가난한 가족에게 ‘왜 하필 지하에 살아서 화를 당하느냐’는 말과 다르지 않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작고 동그랗고 차가운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일일지도 모른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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