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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인 마음여행자 Nov 16. 2022

친절한 강재 씨-영화 [파이란]

샴류의 건달은 일류의 사랑 앞에 그만 무너졌다

‘이 편지를 강재 씨가 보시리란 확신 없어 부치지 않습니다. 이 편지를 보신다면 저를 봐주러 오셨군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나는 죽습니다. 너무나 잠시였지만 강재 씨 친절 고맙습니다. 강재 씨를 좋아하게 됐습니다. 좋아하게 되자 힘들게 됐습니다. 혼자라는 게 너무나 힘들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항상 액자 안에서 웃고 있는 당신, 여기 사람들은 모두 친절하지만 강재 씨가 제일 친절합니다. 나와 결혼해 주셨으니까요. 당신의 아내로 죽어도 괜찮겠습니까? 죽기 전 제 부탁은 이것뿐입니다. 세상 어느 누구보다 사랑하는 강재 씨. 안녕.’


얼굴도 모르는 아내가 쓴 편지를 읽은 후 봉투에 다시 집어넣는 남자의 손이 떨린다. 담배 한 대를 꺼내 물지만 이내 뱉어버리고 솟구치는 울음을 참아보지만 속수무책이다. 바닷가 방파제에서 꺼억 꺼억 통곡하는 사내의 이름은 강재다. 그의 옆에는 죽은 아내의 유골함이 놓여 있다.


인천의 뒷골목을 전전하는 강재는 공갈과 협박을 일삼으며 상인들의 코 묻은 돈을 뜯어내는 양아치다. 돈이 생기면 오락실에서 인형 뽑기에 열중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한심하기 그지없는 인물이다. 함께 건달세계에 입문한 동기(?) 용식은 이미 조직의 보스가 되었지만 강재는 새파란 후배들에게도 무시당하기 일쑤다. 하지만 그에게도 꿈이 있었으니 배 한 척 살 돈을 마련해서 고향으로 입성하는 일이 다. 어느 날 용식이 다른 조직원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용식은 강재가 자기 대신 감옥에 가면 배를 살 돈을 마련해 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고심 끝에 제안을 받아들인 강재에게 갑작스러운 연락이 온다. 아내가 죽었으니 유품을 찾아가고 장례를 치르라는.


오래전 강재는 중국 여성 파이란과 위장결혼을 했다. 홀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이모를 찾아 한국으로 오지만 이모는 이민을 가 버린 뒤였다. 오갈 데가 없어진 파이란은 강재와의 결혼으로 일자리를 얻게 된다. 돈 몇 푼에 오간 거래였기에 파이란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어느 날 부고장이 날아들고 위장결혼 사실이 들통날까 두려웠던 강재는 후배와 함께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장례식장으로 향한다. 기차 안에서 파이란이 쓴 편지를 읽게 된 그의 심장이 일렁인다. 생전 느껴보지 못했던 이상한 감정이었다. 편지와 함께 동봉한 사진 속의 파이란은 단아하고 예뻤다. 장례식장으로 가는 가는 여정에서 그녀의 발자취를 따라가게 된 강재는 파이란이 살았던 집을 둘러보고 주변 사람들을 만난다. 앉은뱅이책상 위에는 언제인지 기억도 없는 자신의 모습이 사진 속에서 웃고 있다. 낯선 이국에서 파이란이 감당해야 했던 삶의 무게와 고단함을 마주한 그는 경찰서에서 몇 분 만에 사망신고가 끝나자. ‘사람이 죽었는데 뭐가 이렇게 간단하냐고!” 소리치며 난동을 부린다.


불법체류자임을 들키지 않기 위해 남편의 얼굴을 익히려고 바라보기 시작한 사진 속의 강재가 그만 좋아져 버린 파이란. 좋아하자 마음이 힘들어졌고 그리움이 물밀듯 밀려왔다. 외롭고 고단한 이 여자는 사진 속 강재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버텨 나갔다. 죽음을 예감하고 쓴 편지에서 파이란은 이리저리 치이며 사람대접도 못 받는 강재에게 ‘당신이 제일 친절한 사람’이라고, ‘세상 누구보다 사랑’ 한다고 고백한다.


강재 역을 맡은 최민식 배우의 말처럼 이 영화는 사랑에 관한 영화라기보다는 구원에 관한 영화다. 남루한 삶을 살고 있던 양아치 강재에게 명의만 빌려주고 잊어버린 한 여자에게서 날아온 편지는 그의 심장에 파문을 일으켰고 그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짐승처럼 오열하던 강재의 눈물 속에는 낯선 이국땅에서 홀로 삶을 견뎌야 했던 여인에게 자신이 등대이자 유일한 희망이었음을 깨닫는 뒤늦은 회한과 안타까움이 담겨 있다. 살아생전 처음 느껴본 감정의 폭우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강재의 가슴속에  ‘내 평생 누군가에게 이렇게 사랑받은 적이 있었던가’라는 절절한 물음 하나가 당도한 것이다. 삼류의 건달은 일류의 사랑 앞에 그만 허물어지고 만다.


‘나는 양아치, 동네 깡패입니다.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 그랬습니다. 결혼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산 나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주었고 당신의 맑은 눈동자는 나를 향해 있었습니다. 당신의 편지를 읽고 가슴 한쪽이 시리고 아팠습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이상한 통증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는 건 이런 느낌인가요? 당신의 아내로 죽어도 좋겠냐고 당신은 내게 물었습니다. 너무 늦어버린 대답이지만 당신은 분명 나의 아내이고 나는 당신의 남편임에 틀림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음을 내게 준 파이란, 당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미처 쓰지 못한 답장을 강재가 되어  보았다. 우연한 인연, 어긋난 만남의 끈은 결국 이어지지 못했지만 파이란이 남긴 사랑은 강재의 존재를 흔들었고 사랑받는 존재가  강재의 삶은 구원받았다. 용식이 숨긴 발톱이 그의 끊어놓기 전까지는


희미해지는 강재의 의식 속으로 ‘파이란 봄바다’의 비디오 화면이 일렁인다. 이 생에서 맺지 못한 인연의 소리가  꿈결같이 아득하게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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