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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꾸 Jul 13. 2020

우리는 스위스로 간다!

여행읽기

결혼 전 한 번은 엄마, 아빠와 배낭여행을 가보고 싶었다. 


어릴 적 내 눈에 부모님은 줄곧 젊지도 늙지도 않은 모습이셨다. 그렇게 그 모습 그대로 변하지 않을 줄 알았다. 엄마가 나를 낳았던 그 나이에  들어서 보니 부모님이 이제 조금씩 세월을 따라 늙어가고 있음이 눈에 들어왔다. 부모님은 더 이상 아줌마, 아저씨가 아니었다. 노인이라는 새 이름표를 슬슬 달 때가 되신 거다.     


그래서 더 마음이 초조해졌다. 한 해 두 해 미루다간 너무 늦어버릴 것만 같아서 서둘러 여행을 준비했다. 부모님은 그동안 여행을 종종 다니셨지만 우리나라 대부분의 엄마, 아빠가 그러하듯 여행사 가이드의 깃발만 부지런히 따라다니며 관광 위주의 코스를 도는 일정이 많았다. 보고 싶은 것만 찾아다니고 마음 내키는 곳에서 맛있는 것을 사 먹고 그러다 또 쉬고 싶으면 쉬는 진정한 여유를 맛볼 수 있는 제대로 된 여행을 하게 해드리고 싶었다.     

길가의 작은 들꽃에도 감동하는 소녀 감성 충만한 엄마를 위해 자연이 아름다운 스위스로 여행지를 정했다. 우리는 각자의 큰 짐을 하나씩 메고 끌며 행복한 여행길에 올랐다.     


엄마는 틈만 나면 부지런히 수첩에 메모를 하셨다. 레스토랑에서 먹었던 맛있는 음식들, 우리가 여행 중에 만났던 사람들의 이름, 우리가 탄 기차의 번호 등. 그 모습이 어찌나 열심인지 마치 스위스에 대해 조사라도 나온 듯한 탐정 같았다. 엄마는 딸과의 여행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작은 수첩 속에 꾹꾹 눌러 담았다.     


스위스 지명은 유난히 길고 어려운 것이 많았다. 하루하루 다르게 총명함을 세월에 도둑맞고 있는 부모님으로서는 생소한 지명을 금방 외우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제네바, 로잔 등 평소 책 속에서 티브이에서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는 지명은 그나마 머리에 쉽게 새겨졌지만 스테인 암 라인, 샤프하우젠과 같이 생소하고 긴 지명은 들어도 들어도 헷갈리는 듯했다. 

 그때마다 엄마는 내게 이렇게 물으셨다.


“민아 오늘 우리 어디 간다고?” 

“응. 스테인 암라인” 

“아.... 스테인 암라인” 


엄마는 몇 번을 조용히 반복해서 발음해보며 수첩에 적으셨다. 그러나 5분도 채 안돼서 


“근데 민아. 스타...... 뭐라고? 어디 보자 내가 아까 여기 적어뒀는데”     


옆에서 무심한 듯 창밖만 바라보던 아빠가 그것도 못 외워서 뭘 그렇게 물어대냐고 괜히 엄마에게 핀잔을 주셨다. 골이 난 엄마는 10분 뒤 아빠에게 묻는다.   

  

“그럼 당신은 지금 우리 어디 가고 있는지 알아요?”


 .............. 5초쯤 망설이다가 아빠는 자신 있게 이렇게 말하셨다.


“어딜가긴! 우리 지금 스위스 간 다아이가! 스위스! 그것도 모르고 따라 댕기나?”   

  

 능청스러운 아빠의 대답은 “너 어디서 왔니? ” “우리 집에서 왔는데요?” 하는 식의 허무한 개그였지만 우리 셋은 한참을 웃었고 스위스 여행 내내 그 말은 우리 가족의 유행어가 되었다.     


“오늘은 우리 어디가? ” 

“스위스 간다! 스위스!!”  


행복했던 작은 기억의 조각들이 모여 사람 사이의 추억의 다리를 놓아준다. 부모님과 나는 서로 수많은 기억들을 공유했음에도 뒤돌아보니 의외로 함께했던 즐거운 기억이 많이 없음에 놀랐다.

가족이지만 서로에게 다 털어낼 수 없었고 온전한 서로의 분신이 되어줄 수 없었기에 부모님과 나 사이엔 추억의 다리가 많이 모자랐다.  


여행은 그것을 메꾸어 줄 좋은 이음줄이었다. 배낭을 메고 상기된 표정으로 내 뒤를 따라오는 부모님을 몇 번이고 돌아보았다. 잘 따라오고 계시는지 피로하진 않은지 이것저것 염려되고 신경이 쓰였다.

내가 어릴 적 부모님도 나를 이런 시선, 같은 마음으로 돌아보셨을 것이다. 그 순간 보호자라는 바통을 드디어 내가 이어받는 기분이었다. 이제 내가 지켜드릴 차례구나. 나를 위해 애쓴 엄마, 아빠 인생의 숱한 시간과 노력들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구나. 그동안 받아왔던 사랑과 배려가 새로운 깨달음처럼 선명해졌다.     


언젠가 우리가 이별하게 되어 서로가 사무치도록 그리운 날,

그 어떤 위로보다 큰 위안이 될 추억을 만들기 위하여, 


우린 오늘 함께 스위스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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