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다, 다신 안 와

다 버리고 새로 시작한다는 허상

by 쏘녕

나는 가고 싶지 않은 장소가 몇 있었다. 수험생활을 했던 도서관, 학원, 힘들 때 기분전환 하러 갔던 공원. 그 장소에 가면 힘든 게 생각난다는 게 일차원적인 이유였고, 공부가 끝나면 그 책을 버리듯이 뭔가 후련하게 정리해버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재수를 하기 위해 돌아갈 땐 누가 알아볼까 봐 너무 싫었고, 나만 이 장소에 남은 것 같고, 나만 계속 제자리 아니 뒤로 밀려나는데 다른 사람들은 하나둘씩 성취하고 있고 이 자괴감을 없앨 만큼의 큰 성과를 갖고 싶은 마음은 더 커졌다. 힘들어서 거닐던 공원도 다시 오기 싫었고.

그런데 떠난다는 건 쉬운 게 아니었다. 일단 나는 합격하지 못했다. 그래서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 야금야금 남겨놓는 책 같이 필요하면 같은 장소에 가야 했다. 시험을 그만두고도 가야 할 곳은 가야 했다. 생각보다 그만한 장소가 없었다. 지금도 토익 하려고 학원에 갔다가 너무 안 맞아서 도서관에 다닌다. 하지만 이제 그 장소들이 불편하지 않다.

대학원을 졸업해서? 그것도 맞다. 내가 방향을 틀고 나서 처음 얻은 성과니까. 그전엔 돌아와서 겪는 모든 것들이 내가 불합격했기 때문에 겪는 거라고 생각했다. 복학해서 아는 사람을 만날까 봐 겁도 났고, 이상한 사람을 겪게 되는 것도 '내가 합격했으면 이런 사람을 안 만나도 됐을 텐데.'로 이어졌다. 취업준비도 모두 무서웠고 '합격했으면 안 해도 됐을 텐데.'는 나를 더 움츠러들게 했다. 실패한 만큼 더 큰걸 가져야 체면이 회복될 것 같았다. 대학원 졸업장이 그 역할을 조금은 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사실 대학원 가기 전에 연마된 것들이 나를 지탱하게 만들었다. 이제는 없어진 학원 건물 간판을 봤을 때 '아, 이렇게 없어질 거에 내가 전부 다 걸어놓고 있었구나.'란 생각이 들며 힘들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그 거리는 밥 먹는 시간조차 죄책감을 느끼던 거리가 아니라 대학원생활을 한 거리로 바뀌었다. 새로운 기억으로, 더 행복한 기억으로 덮는 게 가능해졌다. 공원도 자연을 만끽할 만한 가장 좋은 곳으로 인식하고 있을 뿐 힘들 때 방문하던 곳이란 기억은 지워졌다.

지금 좀 가라앉는 기분도 사실 학부 졸업 후 취준 때랑 기억이 겹쳐서 필요이상으로 감정에 휩싸이는 것 같다. 그냥 내 때를 기다리고, 준비를 하고,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내가 못하지 않는다는 걸 체감하며 취업을 하게 되면 그땐 또 회사 생각으로 이 생각은 다 뒷전에 가있겠지.

비도 오고 그래서 괜히 글이 센치해진 것 같다. 토익 얘기를 하겠다고 했다가 도서관에 다시 다니며 옛 생각이 나서 적어봤다. 도서관은 여전하다. 뒤뜰의 고양이도 여전히 있고. 그때 그 고양이가 아닐 확률이 높긴 하지만..

힘들었던 구간을 잘라내고 다시 시작한다는 건 없다. 나는 없는 걸 갖고 싶어 한 거다. 여기까지가 전부 내 인생이고 그것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나를 만들었다. 지금 하는 것들도 과거의 영향을 받았고 미래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렇게 나를 평생 안고 가야지. 이 애물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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