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가 내고 아이 돌보는 후배
만삭에 면접 보러 온 그녀
첫 만남부터 매우 극적이었다.
외국계 광고회사에서 5년의 경력을 쌓고, 우리 회사에 면접을 보러 온 그녀는
곧 출산을 앞둔 만삭의 임부였다.
하지만, 몸은 매우 가벼웠고, 표정도 매우 밝았다.
한 시간 정도 인터뷰를 해보니
업무의 전문성이나 역량은 매우 탄탄해 보였고,
붙임성 있는 성격과, 새로운 업무에 대한 도전적인 마음가짐도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유머 감각도 있어서 인터뷰하는 시간이 지루할 새가 없었다.
흠잡을 곳이 없는 인재!
단, 문제는
출산하고 와야 하므로 실제 입사까지 몇 개월을 기다려야 한다는 점,
현 직장을 관둘 때 있을 만류와 회유에 혹시라도 넘어갈 수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
“믿고 기다려도 되겠어요?”
하고 나는 물었고,
그녀는 밝게 웃으며 큰 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약 4개월 후,
그녀는 약속을 지켰고,
가벼운 몸으로 우리 회사에 출근을 시작했다.
그리고 3년을 나와 같이 일했다.
그녀는 정말 억척같이 새로운 일들을 해냈다.
같이 해외 출장을 갔을 때는
저녁에 좋은 곳으로 식사하러 가자는 주재원의 호의도 거절하고
다음날 발표를 밤늦게까지 준비하는 씩씩함으로
대한 여성의 기개를 만방에 보여주었다.
마음 약한 나도 덩달아 매우 늦게까지 야근을 하기는 했지만,
다음날 결과가 좋아서 모든 피로는 날아가고,
돌아오는 발걸음도 가벼웠다.
가끔 너무 자발적으로 야근하는 그녀에게
그냥 내일 와서 하라고 하면
“그냥 제가 찝찝해서요. 집에 가서도 어차피 생각은 여기 와 있어요” 라면서 씩 웃었다.
일에 대한 열정은 고마왔지만,
두고 오는 내 마음은 사실 짠했다.
그리고, 또 몇 년이 지난 후,
그 후배도 어느덧 프로젝트 리더가 되어,
본인이 팀원들을 데리고 주도적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
가끔 술자리를 할 때,
그녀는 스스로를 “낀 세대”라고 지칭하며 한탄을 했다
업무 중심의 윗사람에게 맞춰주려는 의지는 충만한데,
정작 자기 밑의 20대 직원들은 워라밸을 중시하는 신세대라,
결국 자기만 야근하게 된다고.
결과만 보면,
팀장이 되어서도 그녀는 계속 야근을 반복했던 것 같다.
아이 교육도 놓치지 않는 그녀
그런데,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후 그녀의 압박감은 더 커졌던 것 같다.
집에서 아이들 돌보는 건 어떻게든 해 냈는데,
학교에 들어가니 교우 관계라는 난관이 생긴 것이다.
엄마가 엄마들 모임에 끼지 못하면, 아이도 아이들 모임에 끼지 못한다나.
회사 일을 조절해서 억척같이 엄마들 모임에 꼭 나가는 눈치였다.
전업주부 엄마들의 정보력에 일방적으로 의존하지 않기 위해서,
자기도 시간을 내서 학원 선생님들과 면담을 하고서는 평가표를 만들었다고 한다.
나름 직장 생활을 오래 한 경험을 살려 커리큘럼 분석도 제대로 하고,
몇 가지 평가의 기준을 세워서 가성비를 제대로 따졌더니
엄마들이 모두 좋아하며 모임에 꼭 부른다나.
“아니, 언제 또 그런 건 했어?”
하니,
의기양양하게
“시간이야 만들면 되죠”한다
대단하다.
그러던 그녀가 어느 날 쓰러졌다
그녀는 작년 연말 다른 본부로 옮겨서, 최근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얼마 전 회사에서 쓰러져서 병원에 옮겨졌고,
자궁에 큰 혹이 생긴 걸 발견하고 급히 수술을 했으며,
한 달간 병가를 냈다고 했다.
걱정이 되어 오랜만에 연락을 했다.
그래, 이렇게라도 쉬는 시간을 갖는 게 오히려 다행이다
라고 위로를 해주려고.
길게 보면 오히려 좋은 일이야. 운운.
그런데 웬걸.
걱정한 내가 무색하게, 그녀의 목소리는 밝았다.
몸은 잘 회복이 되고 있고, 수술 부위는 아프다 말다 한다는데,
정작 그녀의 관심은 모두 아이들 교육에 쏠려 있었다.
아이들 크고 처음으로 한 달간 집에 있어 보는데,
평소에 못해줬던 아이들 기본 생활 습관 잡아 줄 수 있는 게 너무 좋다고.
아, 대단하다.
회사에서나 집에서나
너무나 생산적인 삶이 아닌가.
생활력 갑, 대행사 여자들
그녀뿐 아니라, 대행사 주변에 이런 스타일의 여자들이 많은 것 같다.
우리가 회사에서 돈 받고 하는 일은
사실 단순하게 말하면
문제가 생긴 클라이언트에게 그럴듯한 솔루션을 제시하는 것.
그러니, 눈치, 센스는 기본, 논리력에 추진력까지 갖추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바닥이다.
어떻게 버티지? 싶지만
오래도록 살아남은 여자들은 대체로 공통점이 있다.
한가한 여유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뭔가 문제가 생겼을 때 내가 해결해 내는 것에서 보람과 행복을 찾는 스타일들이다.
요즘 <1호가 될 수 없어>를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그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다소 억척같은 여자 개그맨들의 모습에서
뭔가 공통점이 느껴진다.
흔하게 하는 말로 ‘생활력 갑’이고,
한 후배의 표현을 빌자면
“인생의 어느 링에 올라서도 지지 않으려 하는 여자들”이다.
그래서,
대행사에서 오래 알고 지낸 여자들끼리는
전우애랄까,
뭔가 끈끈한 연대감 같은 것이 있다
체력 관리 잘해서 중간에 나가떨어지지 말고,
자기가 만족할 때까지,
보람차게,
잘,
일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