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과정 전공필수의 아픔
말로 때워지지 않는 시험의 공포
우리 또래, 대학교에서 문과를 전공한 사람들은 안다.
경제학이나 법학이 아니라면, 학교 시험이라는 것이 그다지 큰 부담이 없다는 것
개념과 적용 사례 몇 가지만 제대로 알면 적어도 시험 때문에 낙제는 하지 않는다는 것도.
하지만, 예외의 경우가 통계였다.
사회대, 사회학과였으니 통계가 필수 과목이었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수학을 잊어버리고 싶어 했던 평범한 문과생인 나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존재.
물론 논문을 쓰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툴이지만, 어차피 모두가 논문을 쓸 것도 아닌데,
왜 굳이 이 과목을 전공필수로 해 놓은 건지,,
다들 이를 갈면서도,
졸업을 위해 할 수 없이 주변에 아쉬운 소리 해가며 설문지를 돌리고,
데이터 처리를 하고, SPSS를 돌리고, 통계표를 가지고 기말 리포트를 썼다.
박사과정 첫 두 학기 내내 통계 지옥
그런데, 박사과정에 들어오니 또다시 전공 필수란다.
그것도 통계를 1,2로 나누었으니,
결과적으로 처음 두 학기 내내, 거의 일 년간 고문을 당한 셈이다.
통계 1은 30년 전에도 배웠던 SPSS의 가장 진화된 버전을 배우고,
통계 2는 스마트 구조방정식 분석이 가능한 AMOS를 배운다.
시험문제는 데이터와 가설을 던져주고,
학생들은 통계 패키지를 직접 돌려 가설을 검증해 내야 한다.
리포트 대체 이런 것도 없이, 중간+기말고사를 야무지게도 챙긴다.
결국 4번의 피 말리는 시험을 치러 내야만 했다.
나 같은 만학도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새로운 통계 개념과 단어를 이해하고 외우는 일이었고,
그다음은 실제로 어떤 버튼을 눌러야 기능하는지 프로그램 작동법을 외우는 일이었다.
머리에 새로운 지식이 침투하기 어려운 나이가 아닌가.
있던 지식도 술술 빠져나가는 참에
Covariance는 뭐고 Correlation은 뭔지,
Construct Reliability가 무엇인지,
Average Variance Extracted가 무슨 의미인지,
일단 개념을 이해하면,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 또 그 과정에 익숙해져야 했고,
나온 통계 숫자를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또 외워야 했다.
이미 평평해진 뇌의 주름이 더 이상의 정보를 거부했고,
예전에는 세 번 정도 반복해 보면 익숙해지던 것이 이제는 대여섯 번은 해야
겨우겨우 가물가물 기억을 해 냈다.
통계 교수님과 몇 번의 통화
게다가 온라인 녹화 수업이라 같이 수업을 듣는 동료가 없었다.
같이 입학한 동기 한 명을 알기는 했지만,
나와 비슷한 연배에, 일이 바빠 공부할 시간이 많지 않음을 알기에
딱히 내 질문을 해결해 줄 것 같지도 않아서 답답했다.
통계 1 첫 학기 중간시험 공부를 하던 중 교수님께 질문 메일을 보냈다.
그러자 5분 후 바로 전화가 왔다.
차분한 목소리로, “지금 컴퓨터를 켤 수 있나요?”하고 물어보셨다.
어라? 대학이 정말 많이 바뀌었구나
이렇게나 찾아가는 서비스라니.
감동과 동시에 부담이 밀려왔다.
다행히 마침 집이었고, 책상 앞이어서
바로 컴퓨터를 켜고 말씀하신 내용을 들으면서 다시 수행을 했다.
다행히 통계 패키지가 제대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감사 인사를 드리고 통화를 종료했다.
하지만, 웬걸.
며칠 뒤에 다시 보니 또 머릿속이 순두부가 된 양
몽글몽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아, 괴롭다.
돌아버리겠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요 시기만 넘기자.
다시 한번 기억을 되짚어서 겨우겨우 고비를 다시 넘겼다.
그렇게 흘러 첫 시험은 무난히 끝냈다.
그리고 한 학기가 흘러 다음 통계 2 중간고사 기간이 다시 다가왔다.
여지없이 또 문제가 생겼다.
수업 시간 중에는 무난히 잘 돌아가던 통계 패키지가 잘 되지 않았다.
해석이 불가능한 수치가 나왔다.
다시 또 메일을 보냈더니, 역시나 득달같이 또 전화가 왔다.
짧지만 효율적인 대화가 오가고
또다시 고비는 넘어갔다.
통계 시험 중 갑자기 도착한 메시지
통계 2 마지막 기말고사 시간.
시험 시간이 끝나갈 무렵, 긴장감과 해방감이 동시에 들었다.
어쨌든 다 돌렸으니 설사 좀 결과가 틀렸다 한들 낙제는 아니겠지.
하고 있는데 갑자기 동기생에게서 문자가 왔다.
통계 패키지가 안 돌아간다는.
이미 시간은 다 끝나가고 있는데.
나도 같이 아찔해졌다.
재빨리 교수님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전화해 보라 했다.
다행히 시간을 연장해 줄 테니 얼른 해서 보내라는 대답을 받았다고 한다.
저녁 무렵에 전화가 왔다.
소프트웨어가 갑자기 안 돌아가서 정신이 아득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
덕분에 시험 무사히 끝냈다고.
어차피 나와 같은 만학도의 처지임을 아는지라,
그 순간에 얼마나 당황했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서로 통계 시험의 끝을 축하하며 훈훈하게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러면서 살짝 웃음이 났다.
나만 엉망이 아니었어
이제 해방이다
박사과정 전공필수를 끝냈으니,
이제 더 이상의 높은 과정은 없는 거고,
앞으로 공부를 더 한다 하더라도 이런 시험은 이제 없는 거겠지?
야호! 이제 정말 해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