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무채색에서 다시 유채색으로

세상의 맥락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다시 색깔을 내비칠 용기

by Yoo

색깔이 있는 사람을 좋아했습니다. 그의 색깔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좋아했습니다. 분명한 생각을 또렷이 내비치는 용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좋아했습니다. 일단은 서로의 생각을 꺼내놓아야, 나의 생각과 그의 생각을 툭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나아감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회의실 안에서 나의 생각을 분명히 밝히고 상대방의 생각을 분명히 듣는 과정에서 상승하는 느낌을 좋아했습니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내용을 배우고 그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생각을 조금이라도 주었을 때 몇 시간의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감각을 좋아했습니다. '뭔가 나아감이 있었던 좋은 회의였다.'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 회의실을 나올 때 회사를 다니는 맛을 조금은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처음 회사에 왔을 때 중립적으로 써놓은 보고서가 참 싫었습니다. 열심히 데이터를 분석해서 현황과 현상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가 보이지 않으면 답답해했습니다. 서로의 생각과 서로의 카드를 보여주지 않고 꽁꽁 숨기면서 겉도는 회의를 하는 것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와 시간을 내서 미팅을 하면 나의 생각을 전달해야만 그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리더만 이야기하고 구성원은 묵묵부답으로 있는 적막함을 견딜 수 없었고 용기, 자신감, 영웅심리 그 사이 어딘가 있는 감정을 가지고 먼저 생각을 꺼내놓았습니다.


무언가 문서를 쓸 때는 항상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지라는 단 하나의 문장을 생각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이래서 하는 것이야라는 한 문장 한 단어를 찾고, 그리고 문서를 쓸 때는 반드시 한 페이지에서 하나의 분명한 메시지를 드러내려고 했습니다. 문서가 5장이라면 전체를 통해서 나는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하고,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필요한 문장이 5 문장이 있는 형태를 띠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하면 '나는 이렇게 하는 것이 맞고, 따라서 나는 이런 말을 할 거야'라는 생각을 갖기 위해 노력했고, 그 생각이 드는 순간 프로젝트가 선명해지고 거의 8할 이상은 진행되었다는 감각을 갖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점점 무채색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회사라는 세상, 직장이라는 세상을 알게 되면서 조금씩 왜 선배들이 그렇게 중립적으로 행동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유채색의 내가 존경했던 선배들이 때로는 무너지는 것도 보았습니다. 이 과정을 거치며 진보와 보수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기도 하였습니다. 예전에는 보수라는 가치가 무채색에 가깝다고 생각하였고 변화에 대한 '의지/생각'이 없다고 비판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한때는 너무나 선명한 유채색이었고 단지 달라진 것은, 시간을 통해 세상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된 것뿐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이제는 합니다.


무채색을 이해하면서도 저는 여전히 유채색을 지향했고 유채색이 되고 싶었습니다. 여전히 그렇게 행동하고 살고 있다고 믿던 와중에, 사실은 나의 명도와 채도가 낮아졌다는 것을 확연히 확인시켜 주는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특정 분야의 글로벌 트렌드를 분석해서 보고서를 만들었습니다. 보고서에는 원래 그랬듯 단순히 흐름만 담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나의 생각과 우리 회사관점에서 생각해 볼 만한 이야기를 충분히 담았다고 자신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받았던 피드백은 유채색이라 생각했던 제가 무채색인 누군가를 보면서 생각했던 그것이었습니다.


- 단순히 데이터를 보여주고 어떤 메시지일지 생각해 보라고 하는 것은 동의가 안된다.

- 사람들의 행동에 트리거를 줄 수 없다면 트리거를 촉발하지 못한 시간은 너무나 아깝다.

- 내가 하는 일이에 프랙티컬 하게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

- 데이터는 객관적 중립적 수치가 아니라 내가 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설명하는 수단일 뿐이다.

- 어떤 메시지를 이야기하고 싶다면 대이터의 일부는 시사점에 맞게 일부 조정할 수 있다.

- 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개입하려면 심리와 정서에 대한 이해하고 이의를 맞닥뜨려야 한다.


유채색이라고 믿었던 나의 색깔의 명도와 채도가 나도 모르게 세상과 직장을 이해하며 낮아졌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내가 무채색에 가깝게 되었음을 스스로 인지하고 다시 유채색으로 나아갈 힘을 내는 순간. 세상의 맥락을 이해하면서도 그럼에도 다시 한번 나의 색깔을 내비칠 용기를 내보는 순간. 이 순간들이 모여 직장 생활의 다음 장을 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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