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는 역량에서 잊는 역량으로
최근 주변을 보면 회사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사례가 극단적으로 많아지고 있습니다. 저 또한 그렇고요. AI의 도입은 그동안 업무를 하면서 들었던 생각을 기록해 놓던 저로써는 굉장히 환영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일단 미래의 나를 위해 꾸준히 기록을 해두기는 했는데 그 장수가 수백 장을 넘어 천장을 돌파하고부터는 그것을 다시 읽으며 활용하기도 벅찬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의 글을 이해할 수 있는 도구가 생기니 감사했죠. 나의 모든 구체적인 생각과 고민의 과정을 모두 입력해 줄 수 있으니 업무 관점에서 복제 인간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또 업무가 어느 깊이 이상으로 넘어가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힘든데 나와 비슷한 결로 생각하고 고민을 나눌 수 있는 동료가 생긴다니 환영이었습니다. 평소라면 책이나 각종 자료를 통해 모래 속에서 진주를 찾는 느낌으로 아이디어를 찾았다면, 이제는 간단히 내가 과거에 생각했지만 잊어버렸던 유산을 지금의 나에게 전달하여 새로운 관점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더불어 AI라는 말대신에 빅데이터분석, 통계분석, 자연어처리 등의 이름을 쓸고 생성형 AI라는 말도 없을 때, 학위를 하며 한 땀 한 땀 코딩을 통해 AI를 구현한 이력도 있기에 AI의 등장은 나에게 굉장히 유리한 게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에는 아이디어가 있어도 그것을 코딩으로 구현하는 것 자체가 연구의 큰 걸림돌이었고, 컴퓨터공학 전공 동료의 도움을 받아야만 해결이 가능한 상황도 많았기에 너무나 감사히 신문물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동안 회사에서의 데이터분석은 아무리 데이터를 모으고 분석하고 결과를 내어도 굉장히 가성비가 떨어지는 일이었습니다. 시간은 오래 걸리는데 결과는 평균을 지향하는 특성으로 하나의 특별한 사례를 설명하거나 반박하기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단지 전체적인 경향을 보는 말 그대로 참고자료로만 활용할 수 있었고, 한동안 현타를 맞아 데이터분석을 전공했지만 회사에서 다시는 데이터분석 업무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AI의 등장으로 상사들의 데이터분석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고 코딩의 장벽이 사라지며 업무의 용이성도 높아졌습니다.
그러던 와중 무언가 싸한 느낌을 받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만 오롯이 업무를 진행해 온 보직자들은 전문성이 부족한 특정 분야가 있었습니다. 때문에 해당 분야에서는 업무를 추진함에 있어서 큰 피드백 없이 코멘트 없이 하고자 하는 방향대로 업무를 추진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마치 내가 문서를 쓴 것인가로 착각할 정도로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피드백을 받겠되었습니다.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어보니 저와 몇 차례 업무논의를 하고 보고를 받았던 내용을 녹음해서 AI에 학습을 시키고 그것을 활용하여 자신의 관점을 더해 피드백을 준 것이었습니다.
밀도 있는 피드백을 받아 좋으면서도 이제는 내가 쌓고 정제한 나만의 역량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쉽게 카피될 수 있고 공공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평소에도 저의 생각이나 쌓아놓은 자료를 회사에서 만들어낸 회사의 공공자산이라고 생각하여 공유하곤 했지만, 내가 그동안 힘들게 쌓은 것을 송두리째 뺏기는 감정도 동시에 들었습니다.
그동안은 얼마나 고민하고 경험했냐에 따라 역량에 차이가 분명히 있었고 그 역량의 차이는 쉽게 극복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AI는 다시 모두를 같은 출발선 상에 세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은 역량을 열심히 쌓고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게임의 법칙이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제는 내 것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은 남들이 사용하는 데이터를 만드는 사람으로 전락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AI의 활용 또한 고민의 정수가 있어야 하지만, 나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고민을 학습하기 때문에 이제는 고민의 정수를 만드는 역량의 가치가 점점 떨어질 것 같다는 생각도 많이 들었습니다.
대신 현제 상황의 변화에 대한 미분적 판단을 통해 그때 당장 필요한 것을 빠르게 얻고 배우고 사용하고 또 그것을 재조합하는 역량이 이제는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어쩌면 그동안은 기억하고 기억을 통해 축적하는 것이 역량이었다면, 이제는 반대로 과거를 잊고 미련 없이 다시 시작하고 두려움 없이 도전하고 실패하는 것이 도구가 아닌 주체로써 생존할 수 있는 방안이지 않나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