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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아나할미 Aug 06. 2024

버킷리스트를 꼭 미래에 할 필요는 없지

순례길 Day 1 Roncesvalles

이제 당분간은 단순한 여행에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해외 생활에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가며 약간의 무료함도 함께 오던 와중에 ‘그냥’, ‘막연히‘ 하고 싶다는 그 단순한 감각에 몸을 맡겨보기로 했다. 그렇게 나의 오랜 버킷리스트였던 스페인 순례길을 결정했다.

긴 시간이 남았다고 생각했지만 어느덧 8월, 눈을 떠보니 정말 나는 생장(프랑스 순례길의 시작점)에 와 있었다. 순례길을 시작하기 전 마지막날은 노을이 참 예뻤다. 사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던 이 긴 길의 시작에 그저 아기자기한 마을이 참 귀여웠달까.

새벽에 눈을 떴다. 알람이 채 울리기도 전에 눈을 떠버리다니. 머리는 실감을 하지 못해도 몸은 이미 준비가 된 걸까.

동이 트기 전, 알베르게를 나서서 이 작고 예쁜 마을을 가로질렀다. 무교인 내가 순례길을 걷는다니, 지나는 길에 보이는 성당에 괜히 머쓱하기도 했지만 이왕 가는 김에 나도 기도나 하고 출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두 손을 모아 기도하기도 애매한 정체성의 순례자는 그저 눈을 감고 짧은 바람을 속삭였다.


“이 길의 끝까지 잘 걸을 수 있게, 그 길 끝에 더 나은 제가 있게 해 주세요”

피레네 산맥은 꽤 웅장했다. 구름이 모두 내려다보일 때 즘, 산‘맥’이라고 부를만한 큰 줄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거대한 자연을 목격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아직도 궁금하지만, 항상 그 고민이 무의미해질 만큼 자연의 아름다움은 말을 잃게 만든다.

조급함과 비교는 이 높은 피레네 산맥까지 나를 쫓아왔다.


달팽이를 보았다. 웬만큼 마른땅에 혼자 길을 가고 있는 달팽이. 이렇게 온전하고 예쁜 달팽이를 본 게 얼마만인지 참 반갑더라. 긴 길을 걷는 시작에서 달팽이를 마주하는 게 왠지 모르게 철학적인 것 같으면서도 참 의지가 되었다. ’ 달팽이‘, ’ 거북이‘ 같이 느린 것들은 그 속도가 ’ 틀림‘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라고 어릴 때부터 배워왔다. 맞지, 느린 것이 틀린 건 아니다. 감사하게도 좋은 여건의 나라에서 태어나 많은 것들을 얻고 살았지만, 느린 것은 틀린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었기에 그로부터 체화된 조급증은 항상 나를 뒤에서 쫓아왔었다. 아마 그걸 피하기 위해 호주로 떠나오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이 길까지 와 있는 나는, 적어도 이 길에서만큼은 느리게 걸어보기로 한다.

 라고 생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다시 조금은 빨리 걷고 싶어졌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를 때면, 낯익은 얼굴의 순례자들이 지나쳐갔다. 처음부터 천천히 갈 걸 그랬나, 역시 운동을 너무 안 한 탓일까, 이대로 그냥 쉬지 않고 걸어도 괜찮지 않을까 등등 수많은 생각들이 스쳤다. 물론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길을 걸었지만, 마치 DNA에 새겨진 듯한 나의 조급함과 비교는 이 높은 피레네 산맥까지 나를 쫓아왔다.


그래, 아직 첫날이니까. 이것도 연습이 필요하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에서야, 그 마음을 되돌아보며 내일 마저 해나갈 연습을 준비해 본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풍경은 더해졌다. 구름은 내 옆에 있었고, 눈에 보이는 건 야무지게 풀을 뜯어먹는 소, 양, 말. 오르막이 이어지는 만큼 산은 더 멋있어졌다.

하지 않기로 한 것

길을 걸으며 기회가 되는 대로 여러 생각들을 해봐야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래서 꺼낸 주제는 바로 ‘하지 않기로 한 것’ 나의 진로와 관한 것이기에 치열하게 고민했었고 그만큼 후회도 없는 것이지만, 여전히 나의 길을 고민하고 있는 만큼 앞으로의 결정에 힘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과거의 결정들을 곱씹어보고 싶었다. 이 길을 걷는 동안 종종 잘 떠올려볼 수 있기를 바란다. 오늘 안에 끝내려 했지만 역시나 나의 생각은 이곳저곳으로 튀었기에 내일을 기약하며…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그냥’ 만큼 요즘 꽂힌 감각은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이다. 이 표현이 가지고 있는 긍정과 확신은 참 매력적이다. 나는 살면서 이런 표현을 해본 적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참 새롭고 명확해서 자꾸 머리에 맴도는 것 같다.

알베르게의 빨래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내리막길에 어이없는 웃음까지 나던 찰나, 드디어 목적지인 알베르게가 눈에 들어왔다.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만큼 커다란 수도원은 영화에서 본 것 마냥 어딘지 모르게 신실한 에너지를 뿜내고 있었다. 샤워를 하고, 흠뻑 젖었던 옷을 빨아 건조대에 매달았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본 커다란 빨랫대에서 나는 왠지 모르게 자유로움을 느꼈다. 각종 탈것들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이렇게 비효율적인 걷기를 실천하는 이들이 비움과 비움을 거듭해 남겨온 빨래 아닌가! 무소유 그 자체의 현장인 것만 같아 경이롭다고까지 표현하고 싶은 심정(?)이다.

아무튼, 탈수 오지 않고, 주저 않지 않고 가장 험하다는 첫날 목적지까지 25km를 걸어온 나를 칭찬하며! 오늘 셔터는 10시에 내립니다.


부엔 까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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