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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아나할미 Aug 07. 2024

힘든 시간이 더 아름답게 기억되는 건

순례길 Day 2

Day 2 론세스발레스 -> 주비리 (20km)

눈이 번쩍 떠졌다. 5시 반에 일어나려 했는데, 왠지 모르게 또 알람이 울리기 직전에 눈을 떠버렸다. 이른 기상의 익숙한 피로감과 익숙하지 않은 뻐근함에 둔한 몸짓으로 이층 침대에서 내려왔다. 서두르지 않았지만 짐 싸기를 아주 금방 마무리하고, 작은 나의 짐에 다시 한번 뿌듯함을 느꼈다.

한 층에 18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 알베르게에 삼분의 일 정도는 일어나 있을 때였을까, 아직 조명이 켜지지 않은 어둠 속에 기상 노래가 들려왔다. 알베르게의 운영을 담당하는 자원봉사자분께서 모든 순례자들을 깨우는 소리였다. 이제 일어날 시간이라는 그 노랫소리에 괜스레 더 기분이 좋았다.

알베르게가 있는 수도원을 벗어나 길을 걷자 어제와는 사뭇 다른 풍경들이 펼쳐졌다. 작은 마을에 같은 색 지붕을 한 주택들이 줄지어 있었고, 창에는 저마다 다른 색의 꽃화분을 둔 곳들도 눈에 띄었다. 이 건물은 얼마나 오래됐을까, 이 마을의 건물들은 어떻게 다 같은 색일 수 있을까, 그 같은 색/모양의 건물들이 왜 이리도 예쁘게 보일까 하는 단순한 생각들이 계속 이어졌다. 와, 1915년에도 이 슈퍼가 있었다니! 보존되어 온 시간이 멋지기도, 부럽기도 했다.

부담스럽지 않은 오르막과 돌길 그리고 작은 마을들이 이어지는 길이었다. 골목을 막 벗어나자마자 커다란 성당이 눈에 들어와 감탄하기도 하고,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에 징검다리를 건너기도 했다. 어제에 비하면 아기자기하고 평온한 여정이었다.  

아침으로는 또르띠아를 먹었다. 호주에서 만난 스페인 친구들 덕에 이미 몇 번 먹어본 메뉴였고, 그 간단한 레시피에서 나오는 맛에 매번 감동했던 기억이 있었기에 선택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운 그 친구가 보고 싶었다는 이유가 가장 컸을 것이다. 호주 생활 전체를 통틀에 내게 가장 소중한 인연이라고 할 수도 있을 정도로 내게 좋은 사람이었다.

아, 드디어 그의 나라 스페인에 왔구나!

다시 길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다시 배가 고파졌다. 허허 역시 이런 여정의 시작은 참치마요 컵밥 큰 컵으로 시작해줘야 하는데, 하며 다음 마을에 있는 마트로 들어갔다. 대충 요깃거리들을 챙겨 나와 먹고는 다시 가방을 정비했다. 어제의 늦은 일정으로 인해 채 다 마르지 않았던 빨래를 꺼내어 가방에 매었다. 이제야 좀 순례자 가방 같네, 라고 생각하며 왠지 모르게 뿌듯하기까지 했다.


’하지 않기로 한 것‘

어제 생각해 보던 것을 다시 떠올렸다. 군인이 되는 것. 그건 내가 아빠를 동경해서 하고 싶었고, 아빠와 다른 삶을 살고 싶어서 하지 않기로 했던 것이었다는 것 말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아빠를 너무 닮은 나는 명예로움과 정의로움에 항상 가슴 뛰어하기에, 그 부분을 충족시켜 줄 다른 일들을 벌여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미 치열하게 고민해 오며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이렇게 다시 꺼내어 정리하니, 지나간 선택을 뒤돌아보지 않고 그 선택을 더 굳게 지켜나가 줄 다른 방도를 찾은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역시 스페인의 햇살은 강했다. 챙이 넓은 모자를 썼지만, 밝은 돌바닥에 비치는 강렬한 햇볕에 얼굴이 익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힘든 시간이 더 아름답게 기억되는 건

어제보다 분명 오늘의 길이 더 쉬웠다. (덜 어려웠다고 말하는 것이 더 맞겠지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 더 자주 하늘을 올려다보고, 풍경을 감상하며 길을 즐긴 것 같다. 너무 힘들었던 탓에 자주 쉬어가야 했던 이유가 가장 크겠지만, 그 덕에 지나고 보니 더 아름다운 기억들이 많다.

오후 1시 반. 어제보다 무려 3시간이나 일찍 목적지에 도착했다. 미처 다 마르지 않은 빨래를 서둘러 널어놓고, 가방을 정리하고 나니 빨래가 다 마르는…! 스페인 햇살의 엄청난 에너지를 느끼며 오늘의 셔터는 여기서 내립니다.


부엔 까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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