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 Day 2 Zubiri
눈이 번쩍 떠졌다. 5시 반에 일어나려 했는데, 왠지 모르게 또 알람이 울리기 직전에 눈을 떠버렸다. 이른 기상의 익숙한 피로감과 익숙하지 않은 뻐근함에 둔한 몸짓으로 이층 침대에서 내려왔다. 서두르지 않았지만 짐 싸기를 아주 금방 마무리하고, 작은 나의 짐에 다시 한번 뿌듯함을 느꼈다.
한 층에 18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 알베르게에 삼분의 일 정도는 일어나 있을 때였을까, 아직 조명이 켜지지 않은 어둠 속에 기상 노래가 들려왔다. 알베르게의 운영을 담당하는 자원봉사자분께서 모든 순례자들을 깨우는 소리였다. 이제 일어날 시간이라는 그 노랫소리에 괜스레 더 기분이 좋았다.
알베르게가 있는 수도원을 벗어나 길을 걷자 어제와는 사뭇 다른 풍경들이 펼쳐졌다. 작은 마을에 같은 색 지붕을 한 주택들이 줄지어 있었고, 창에는 저마다 다른 색의 꽃화분을 둔 곳들도 눈에 띄었다. 이 건물은 얼마나 오래됐을까, 이 마을의 건물들은 어떻게 다 같은 색일 수 있을까, 그 같은 색/모양의 건물들이 왜 이리도 예쁘게 보일까 하는 단순한 생각들이 계속 이어졌다. 와, 1915년에도 이 슈퍼가 있었다니! 보존되어 온 시간이 멋지기도, 부럽기도 했다.
부담스럽지 않은 오르막과 돌길 그리고 작은 마을들이 이어지는 길이었다. 골목을 막 벗어나자마자 커다란 성당이 눈에 들어와 감탄하기도 하고,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에 징검다리를 건너기도 했다. 어제에 비하면 아기자기하고 평온한 여정이었다.
아침으로는 또르띠아를 먹었다. 호주에서 만난 스페인 친구들 덕에 이미 몇 번 먹어본 메뉴였고, 그 간단한 레시피에서 나오는 맛에 매번 감동했던 기억이 있었기에 선택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운 그 친구가 보고 싶었다는 이유가 가장 컸을 것이다. 호주 생활 전체를 통틀에 내게 가장 소중한 인연이라고 할 수도 있을 정도로 내게 좋은 사람이었다.
아, 드디어 그의 나라 스페인에 왔구나!
다시 길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다시 배가 고파졌다. 허허 역시 이런 여정의 시작은 참치마요 컵밥 큰 컵으로 시작해줘야 하는데, 하며 다음 마을에 있는 마트로 들어갔다. 대충 요깃거리들을 챙겨 나와 먹고는 다시 가방을 정비했다. 어제의 늦은 일정으로 인해 채 다 마르지 않았던 빨래를 꺼내어 가방에 매었다. 이제야 좀 순례자 가방 같네, 라고 생각하며 왠지 모르게 뿌듯하기까지 했다.
어제 생각해 보던 것을 다시 떠올렸다. 군인이 되는 것. 그건 내가 아빠를 동경해서 하고 싶었고, 아빠와 다른 삶을 살고 싶어서 하지 않기로 했던 것이었다는 것 말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아빠를 너무 닮은 나는 명예로움과 정의로움에 항상 가슴 뛰어하기에, 그 부분을 충족시켜 줄 다른 일들을 벌여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미 치열하게 고민해 오며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이렇게 다시 꺼내어 정리하니, 지나간 선택을 뒤돌아보지 않고 그 선택을 더 굳게 지켜나가 줄 다른 방도를 찾은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역시 스페인의 햇살은 강했다. 챙이 넓은 모자를 썼지만, 밝은 돌바닥에 비치는 강렬한 햇볕에 얼굴이 익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어제보다 분명 오늘의 길이 더 쉬웠다. (덜 어려웠다고 말하는 것이 더 맞겠지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 더 자주 하늘을 올려다보고, 풍경을 감상하며 길을 즐긴 것 같다. 너무 힘들었던 탓에 자주 쉬어가야 했던 이유가 가장 크겠지만, 그 덕에 지나고 보니 더 아름다운 기억들이 많다.
오후 1시 반. 어제보다 무려 3시간이나 일찍 목적지에 도착했다. 미처 다 마르지 않은 빨래를 서둘러 널어놓고, 가방을 정리하고 나니 빨래가 다 마르는…! 스페인 햇살의 엄청난 에너지를 느끼며 오늘의 셔터는 여기서 내립니다.
부엔 까미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