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 Day 3 Pamplona
기상 시간이 점점 늦어진다. 첫날 5시, 둘째 날 다섯 시 반, 오늘은 여섯 시 반…! 어제저녁 늦게까지 축제가 열린 마을 광장에서 부지런한 청소부가 물청소를 하고 있었다. 밤새 들렸던 신나는 음악만큼 광장 바닥에도 열기가 남아있는 듯 했다. 그 길을 뒤로하고 다시 마을 입구의 다리로 길을 걸었다. 오늘의 여정은 평평할 예정이라는 안내판을 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산길이었다. 풀숲을 헤치고 걷기도, 공사판 한가운데를 지나기도 하며 시간이 흘렀다.
순례길은 시작부터 한국어 투성(?)이었다. 생장의 알베르게에는 곳곳에 한국어가 적혀있었고, 짐 배송 업체에서도 한국어로 적힌 안내종이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중국어, 일본어도 아닌 한국어가 이탈리아/프랑스어 안내 문구와 함께 병기되어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작년(2023년)한 해 동안 순례길을 찾은 이들의 출신 국가 통계에서 한국은 무려 5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수많은 주변국들을 제치고 지구 반대편 한국에서 온 이들이 왜 이리도 많았던 걸까.
내가 즐겨 듣는 팟캐스트의 작가님들이 만든(?) 단어 ‘볶아치즘’이 한국인들의 순례길 사랑과 맞닿아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 순간 더 잘해야 하고, 더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고, 분발해야 하는 것이 ‘정상’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휴식은 죄악에 가깝다. 적어도 나는 가만히만 있으면 왠지 안될 것 같은, 뒤쳐져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버릴 것만 같은 불안감에 종종 휩싸이곤 했다. 그런 압박감이 우리가 길을 떠나도록, 이곳으로 도망쳐오도록, 혹은 스스로 더 힘든 챌린지에 놓이도록 하지 않았나 싶다.
아 물론, 한국인이 다른 국가들보다 종교적으로 더 신실해서일 수도, 혹은 몇 년 전에 방영한 TV예능 스페인 하숙의 영향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길을 걷다 맑은 계곡을 지나쳤다. 많은 순례객들이 잠시 가방을 내려놓고 쉬고 있었다. 나도 역시나 조금 마음이 동했지만, 다잡고 다시 길을 나섰다. 그런데 조금 지나고 보니 쉴 곳이 필요해졌다. 아, 역시 남들 쉴 때 쉬는 게 좋구나. 도시에서나 순례길에서나 동일한 진리를 깨달은 것만 같았다.
8월의 순례길은 매우 덥다. 11시쯤부터는 햇살이 정말 뜨거워 챙이 넓은 모자의 덕을 크게 본다. 하지만 그 모자로도 부족할 때가 있다. 오늘 걸어온 길의 대부분은 바닥이 밝은 암석과 자갈로 되어있어서, 모자로 빛을 막아도 바닥에서 반사된 빛이 얼굴을 밝혔다. 주변에서는 그 강렬한 햇볕으로 말라버린 식물들을 종종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도, 덕분에 풍경은 더 아름답다.
팜플로나 도심에 진입하니, 아기자기한 빌라들과 잘 정비된 도로가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보였다. 빌라 앞에 놓인 해바라기 꽃은 스페인의 여름에 참 잘 어울렸다.
도시의 이색적인 풍경은 그 곳에 막 도착했을 때, 가장 잘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스페인의 도심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바로 쓰레기통이다. 저걸 수거는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될 정도로 정말 큰 쓰레기통이 곳곳에 아주 자주 놓여있었다.
중국 식료품점에서 며칠 째 고대하던 라면을 만나 울뻔했지만 다행히도 점잖게 계산을 마쳤다. 이상하게도 곳곳에서 보이는 무궁화가 신기했다. 한국에서도 자주 보기 힘든 한국의 국화가 이곳에서는 흔하게 자연으로 피어있다니, 이것도 이 계절에 오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라 생각하니 참 반가웠다. 이렇게 낯설과 이색적인 것들의 연속이었다.
정말 이상한 것이 하나 더 있었다. 호스텔의 수도꼭지였다. 사진을 찍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당최 이유를 모르겠는 모양이었다. 물이 내려오는 곳 바로 아래 수도 손잡이가 놓이게 하다니. 도대체 누가 이렇게 물건을 만들었는지, 또 이걸 왜 설치했는지 참 궁금하다.
오늘 하루는 평범하게 걷고, 많이 피곤해 하다가 배부르게 라면을 먹고 마무리했다. 하루이틀 안에 끝나는 여정은 아니기에 이런 일상에도 적응이 될 수 있겠지만, 곳곳에서 느끼는 낯선 감정들에 익숙해지지는 않았으면 한다. 매일 더 새롭게 생각하고, 더 고민하고, 사람들과 더 대화해 봐야겠다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