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생활 적응기
22년 동안, 나는 너무나도 한국에 익숙해져 있었다.
비자발급, 은행업무 등 북경 생활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일처리를 하며 답답한 마음이 커져갔다. 특히 행정처리가 아주 환장할 노릇이었다.
통장 개설을 한 번 할 때도 한국 행정시간의 곱절이 소요된다. 통장 개설을 위해 공상은행을 갔고, 번호표를 뽑은 후 3시간을 내리 기다렸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 창구에 갔더니, 오늘은 내가 요청하는 업무는 끝이 났으니 다음에 오라고 한다. 한국 업무 스타일이 익숙했기에, 왜 안되는지 집요하게 물었고 직원은 끝끝내 처리해주었다.
행정업무, 학교 업무 모두 무언가를 요청하면, 안된다는 대답부터 나왔다. 직원들은 没有(없어요)라는 대답이 자동응답기처럼 나왔다. 특히, 기숙사 1층의 직원 阿姨们(아주머니)들에게 무언가를 요청하면 没有로 자동응답을 해주셨다. 일부러 학생들의 미흡한 중국어를 못 알아듣는 채 하기도 했다. 아주머니들의 행동에 뒤돌아서서 불같이 화내기도 하고 서투르게 행동하기도 했다.
그렇게, 첫 적응기도 지나가고 새 학급에 배정받았다. 왕선생님반에 배치되어 영국, 미국, 일본, 한국, 인도네시아, 북한, 네덜란드, 프랑스 등 다양한 국적의 반의 친구들을 만났다. 사라라는 프랑스 친구는 K-Pop, 드라마를 좋아하여 한국에 대한 관심을 보였고 쉽사리 친해질 수 있었다. 나보다 한국을 더 잘 알던 사라와 함께 드라마를 보기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의 친구들 멕시코인, 이집트인, 마케도니아인과 친해졌다.
새롭게 사귄 친구들과 소통할 때 언어의 장벽이 컸다. 외국인 친구들은 대규모로 모이면 주로 영어로 소통했다. 나는 영어로 말이 쉽사리 나오지 않았고, 짧은 영어로 대답을 하거나 중국어로 대답하기 일쑤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중국어로 소통하기 시작했고 영어로 들어도 중국어로 자연스럽게 전환되었다. 다음 학기에는, 주로 일본인, 태국인 친구들과 친해졌고 중국어로 소통하는 것이 수월해졌다. 그렇게 천천히 나는 중국에 적응하고 스며들 수 있었다.
중국 생활을 감칠맛 나게 하는 요소들,
1) 방방곡곡에 대한 호기심
중국 생활을 떠올려보면 호기심이 가장 왕성했던 시기였다. 중국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아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북경의 관광지를 돌아다녔다. 첫 달은 혼자서 이화원, 치안 먼 등을 혼자 다니며 사진 찍고 길을 모르면 중국인들에게 물어보고 이야기하면서 낯선 이들과 친해지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혼자 하는 것들이 있지만, 해외에서 혼자 무언가 해나간다는 것이 스스로 멋지게 느껴졌다. 그때보다 성장한 것이 많아졌지만, 나 자신이 나에게 한없이 다정했던 그때가 그립기도 하다. 스스로 자아도취하는 것이 행복의 요소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낯선 사람과 대화해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한 번 깨기 시작하자 과감하게 소통했고, 자연스럽게 언어가 금방 늘기 시작했다.
2) 중국의 다른 면모를 보여준, 봉사활동
애초부터 중국에서 봉사활동을 할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느 날, 학교 Weixin을 보다가 봉사자를 모집한다는 소식에 모임을 참여하게 되었다. 매달 1~2회 북경 외곽의 학교를 찾아 봉사하곤 했다. 중국인 친구들이 주로 학교 컨텍과 활동을 준비해주었고, 그 안에서 활동을 하고 학습을 도와주는 건 외국인들이었다. 적극적인 태도로 봉사에 임하는 캐나다 친구와 말레이시아 친구를 만났다.
북경 중심가에서 생활하며, 북경은 발전되어있는 곳이라고만 느껴졌는데 버스를 타고 40분만 가보아도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버스를 내려 꽤나 걸어 들어간 학교는 학교인지 모를 허름한 건물의 외형을 가지고 있었다. 화장실은 쓸만하지가 못 해, 봉사시간에 화장실을 간 적이 한 번도 없다. 지금은 시간이 7년 정도 흘렀으니 다를지도 모르겠다.
화려해 보이던 북경에서도 빈부격차는 존재했다.
관심을 가지기 전, 화려함에 가려 모를 뿐이었다.
3)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켜주던, 한국어 관련 커뮤니티 활동
학교에 한국어를 가르치는 커뮤니티가 있었다. 한국어과 학생들이 운영하는 오래된 학회였다. 공고를 보자마자 바로 지원을 했다. 생각보다 체계적으로 운영되는 학회였고, 나는 서류 및 면접 과정을 통해 교사로 선발되었다.
그 전에는 일괄적으로 딱딱하게 한국어를 가르쳤는데, 열성적인 한국어 선생님들이 모여 유난히 재미있게 커리큘럼을 짰다. 드라마를 활용한 수업, 노래를 활용한 수업을 준비했다. 그중에서도, '태양의 후예'를 바탕으로 역할극과 노래를 준비했던 수업이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의자가 모자라 다른 반의 의자를 가져와서 수업을 할 정도로 교실을 가득 채운 학생들과 열기를 잊지 못한다. 다 같이 태양의 후예 노래를 따라 부르던 영상은 아직도 나의 휴대폰에 남아있다.
4) 중국의 이색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던, 중국 여행
중국학을 전공해서 여행에 대한 호기심이 컸다. 지역학에 대한 공부도 당연히 뒤따랐기 때문이다. 조금만 쉬는 날이 있어도 새로운 지역을 찾아 여행을 다니기 바빴다. 겨울방학을 맞이하여 혼자 첫 장기 여행을 다녀왔었다. 당시 혼자서 해낼 수 있다는 것이 들떴고 스스로 자랑스러워했던 기억이 크다.
몽고와 비슷한 특징을 가졌고 승마 체험과 드넓은 초원을 볼 수 있었던 내몽고,
북경과 가깝지만 좀 더 규모는 작고 세련된 느낌을 풍겼던 천진,
겨울왕국에 방문한 듯한 느낌을 받았던 하얼빈,
칭다오 맥주 박물관이 인상적이었던 칭다오,
발전되었지만 북경과 상해 느낌과는 사뭇 다르던 광저우,
맑고 청아하다는 느낌을 받았던 항저우와 쑤저우,
민족대학살의 흔적을 볼 수 있었던 난징,
중국의 예전 모습이 물씬 남아있던 구이린,
진시황릉, 병마용갱 등 중국 역사를 느낄 수 있었던 서안,
먹었던 마라탕 맛이 잊히지 않는 사천
...
점점 방문하는 곳이 많아질수록 각 지역의 언어와 사람들의 외모 특징 등이 색다르게 느껴졌다. 나는 이제 중국을 알 것 같은데, 다른 지역을 방문할수록 아직 중국의 일부만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지역을 다니며 어투, 문화 등 다른 특징을 쏙쏙 알아가는 것이 여행의 재미였다.
벌써 중국을 다녀온지도 6~7년이 되어간다. 그곳에서 깨어진 감각들로 조금은 글로벌한 사람이 되었고, 현재 나의 생각에도 큰 영향을 준다.
내가 느낀 중국은, 언뜻 보기에 보편화되어 보이기도 하지만 다양성을 가진 나라이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이 보고 느끼고 소통해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알지 못하는 중국의 세계가 더 넓다. 유학을 다녀온 이후, 다시 여행을 가보아도 또 다른 모습을 알게 되고, 알아가는 것들이 많다. 한 사람을 아는 과정도 수십 년이 걸리는데, 한 나라는 더 큰 색깔을 담고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