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양귀자)을 읽고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 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p.127
내 얘기하는구나, 하고 뜨끔했던 구절.
작은 상처, 큰 은혜. 오래 간직하고, 망각하고. 꼭 받아야 할 빚과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
내게 상처를 주는 사람은 은혜도 베푼 사람이다.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에 상처도 줄 수 있다. 은혜 베풀지 않은 자의 객기는 별 미친놈 하고 무시해 버리기 때문이다. 큰 은혜를 베풀고 작은 상처를 낸 그들에게 난 무엇을 그리 돌려받고 싶은가. 절대로 미안하다고 해 줄 리 없는 사람들. 큰 은혜를 기억하면 미운 마음도 사그라들까. 그러나 간사하게도 지나가버린 큰 은혜는 생동감이 없다. 그 의미의 무게가 자꾸만 줄어든다.
몇 가지 무심한 말로 본의 아니게 내 마음에 작은 생채기를 낸 것 말고는 주리 역시 마음이 여리고 착한 아이였다고 나는 기억한다. (중략)
진모의 행동을 꾸짖는 천사의 얼굴은 엄격했다. 그건 옳은 말이었다. (중략) 그렇지만 나라면 주리처럼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삶은 그렇게 간단히 말해지는 것이 아님을 정녕 주리는 모르는 것일까. (중략) 그건 옳지 못한 거야,라는 주리의 관용구. 주리는 바로 그 관용구 밑에 숨어서 더 이상을 세상 속으로 나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중략)
나는 이모를 위해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다. 주리 식으로 말한다면 이런 거짓말도 분명 ‘옳지 못한 것’이겠지만 나는 주리가 아니고 안진진이었으므로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었다. p. 172~179
비슷한 경험이 있다. 3살쯤 어린 사촌동생이었다. 막내고모 딸이었고, 아버지가 고모와 왕래가 많던 시절이었다. 돈 꾼 게 미안해 그 집 조카들한테 살뜰히도 잘하던 시절. 그 계집애는 생전 무뚝뚝한 경상도 아버지 밑에 살다가 작은 삼촌의 다정함에 놀랐을 것이다. 자기 엄마 밑에서 귓동냥으로 우리 부모의 사정을 들었겠지. 그런 그 계집애가 말했다.
“언니, 아무리 부모님이 이혼하셨어도 삼촌한테 잘해. 삼촌 정말 불쌍해.”
나는 그때 그 계집애의 따귀를 올려붙이며 “네가 뭘 알아? 돈 많은 부모 밑에서 철없이 사는 네가 어디서 훈계질이야!”하며 쏘아붙이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상처는 상처로 위로해야 가장 효험이 있는 법이었다. 당신이 겪고 있는 아픔은 그것인가, 자, 여기 나도 비슷한 아픔을 겪었다, 어쩌면 내 것이 당신 것보다 더 큰 아픔일지 모르겠다, 내 불행에 비하면 당신은 그나마 천만다행이 아닌가…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억울하다는 생각만 줄일 수 있다면 불행의 극복은 의외로 쉽다. p. 188
타인의 불행으로 위로를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것이겠냐만은 그것이 인간이라는 말에 또다시 위안을 얻는다. 너만 그런 것이 아니다. 나는 더 하다. 그러니 억울해할 것 없다.
슬픔의 한가운데를 파고 들어가 보면 ‘억울함’이 숨어 있다. 내가 뭘, 내가 뭘 그렇게. 다른 사람보다 내가 뭘 얼마나.
억울함에 압도당하면 슬픔과 무력감이 되고, 억울함의 화살을 바깥으로 돌리면 분노가 된다. 나는 분노를 택했다. 소리 없는 분노를 택했다. 더 이상 우울해지고 싶진 않아서, 화살을 모두 바깥으로 조준한 것이다. 쏠 생각은 없다. 그래서 소리 없는 분노라고 했다. 몸집을 최대한 부풀려서 모든 털을 삐쭉삐쭉 세웠다. 어쩌라고, 뭐! 그러면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겁 많은 고양이처럼 이 겨울을 버틸 것이다.
덧+
제 마음속 1등 책은 ‘스토너’입니다. 이 책을 만나고 제 마음 1등 책은 이제 두 권이 되었습니다.
이 책 제목이 왜 모순일까 제 마음대로 추측해 보자면, 안진진의 어머니와 이모의 삶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쌍둥이였던 그들이 결혼을 통해 전혀 다른 삶을 살지요. 그러나 결국 불행이 행복임을 말해주는 모순에 다다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안진진의 선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전혀 다른 두 남자를 놓고 누구와 결혼할지 망설이던 그녀의 선택이 다시 모순적이거든요. 우리의 안진진은 그 남자의 계획표 안에서 불행하고도 행복하게 살았을지 무척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