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당신 : 신입사원
입사 면접 때 면접관들이 의례적으로 묻는 것이 있다.
“애인과 저녁에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그 애인은 당신에게 정말 중요하다. 오랜만에 즐기는 데이트다. 그런데 선배나 임원이 '급히 내일 오전까지 마무리해야 할 업무가 있어 야근을 하라'고 지시했다. 당신은 어떤 결정을 하겠는가?”
예전에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직장 다음에 애인, 애인 다음에 가족 아닙니까? 당연히 야근하라면 해야죠.”
과거 내가 신입사원 채용을 위한 1차 대면면접을 하면서 직접 겪은 일이다.
“왜 야근을 합니까? 왜 자기 업무를 제때 끝내지 못해 회사나 동료에게 물질적, 정신적 피해를 줍니까? 아직까지도 이 기업은 옛날 업무 시스템을 선호합니까?”
그 대답에 당시 면접관들은 황당함을 느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를 1차 면접에 통과시켰다.
그는 지난 2년 간 우수사원으로 표창장을 받았다.
그의 등장으로 그가 속한 부서 실적은 매년 15% 상승하였다.
그 덕분에 선배 대부분이 승진하였다.
그러나 가끔 들리는 소문에 그의 인간성을 탓하는 소리가 많이 들리고 있다.
아무리 부서 내에 급한 일이 있어도 야근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자신의 신조는 퇴근 전까지 주어진 업무, 계획된 업무 스케줄대로 처리해야 된다는 것이다.
솔직히 그 부서의 야근이라고 해봐야 특정한 업무를 전 부서원이 같이 하는 일은 아니다.
조립식 로봇과 같이 부서원 개인에게 주어진 독립적인 일을 마무리하여 결과물을 합치고 조금 다듬으면 업무가 완성되는 일종의 용병조직이다.
용병조직은 주어진 일만 제대로 하면 된다.
남들에게 일과 관련된 피해만 주지 않으면 된다.
마지막 팀워크가 필요할 때만 같이 움직이면 된다.
어느 날 나는 그에게 저녁식사 하자고 하였다.
겨우 약속을 잡았다.
일주일 후 회사 근처 식당에서 삼겹살구이를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적절하게 술이 달아오른 나는 “왜 너는 야근을 하지 않냐? 한국 문화에서는 적절치 않아.”
그런데 그의 대답에 할 말을 잃었다.
오히려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야근 좋죠. 혼자 자취하는데요, 야근하면 저녁식사 공짜로 할 수 있겠다, 전기세 아끼겠다, 휴게실에서 공짜로 커피도 마실 수 있겠다. 그런데 저는 선배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30분 정도 저녁 식사하고 커피 한잔 마시면서 담배 피우고 잡담하고 칫솔질하고. 대충 이러면 1시간 지납니다. 책상에 앉으면 7시쯤. 이메일 확인하고 연애기사 없는지 인터넷 서핑 하다가 8시쯤에 퇴근합니다. 이런 게 회사에 도움이 되나요. 제가 시골 출신이라 그런지 전기 귀하고, 남의 돈 함부로 쓰지 말라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센터장님. 저는 체질상 열이 많아 집에 가서 샤워를 한 후 일을 해야 합니다. 사무실 공기가 너무 탁하고, 여름에는 오후 6시 지나면 바로 에어컨을 끄는데 이런 환경에서 야근을 어떻게 합니까. 내 돈을 쓰더라도 집에서 편안히 일을 하죠. 이런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솔직히 야근하는 저의 모습이 무척 무능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집에서 밤을 지새우더라도 제가 계획한 것은 아무도 모르게 혼자 끝내고 싶습니다. 자신의 무능함을 자랑이나 하듯 야근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들도 저를 이해할 수는 없겠죠.”
야근은 필요악이다.
아직도 많은 임원들은 직원의 인사고과를 매길 때 야근을 많이 한 사람이 성실하게 업무에 임했다는 식으로 연결 짓고 있다.
야근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물리적, 시간적, 능력 등의 제약으로 제때 업무를 끝낼 수 없는 상황이 있다.
본인이 야근을 하는데 자기보다 어린 후배가 칼퇴근하는 것을 나쁘게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각자마다 업무처리 스타일이 있다.
지긋이 책상에 앉아서 일하는 사람이 있고, 50분 일하고 10분 쉬는 것을 반복하는 사람이 있고, 오전에는 생각만 하다가 오후부터 집중해서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있다.
야근과 업무 성과를 연계하지 말라.
야근은 납기를 지키기 위한 충분조건일 뿐이다.
좋은 선배라면 될 수 있는 한 후배들에게 제 때 퇴근하라고 권유해라.
납기를 제때 지키지 않거나, 대충대충 업무를 처리하거나, 업무성과가 나쁠 때 충고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만 충고를 하면서 본인이 그 일을 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자신도 신입사원과 비슷한 업무처리 결과를 내놓을 것 같으면 차라리 말하지 말라.
그 신입사원은 당신의 충고를 역겹게 생각할지 모른다.
(Dall-E 이용, Prompt: 사무실에 있는 벽시계는 오후 6시. 사무실 밖은 비가 와서 약간 어두워. 부서장이 부서원들에게 퇴근하라고 지시하는 그림을 그려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