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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Apr 01. 2023

남자는 레깅스

 내 다리는 예쁘다. 아내의 다리도 예쁜 편이지만 내 다리에 미치진 못한다. 평생을 스쿼트로 다져온 엉덩이는 가을 하늘을 찌를 듯하고, 그 아래로 길게 뻗은 모양이 혈통 있는 종마의 그것과도 같으며, 종아리 근육은 적당히 부풀어서 안정감 있고 잘록하게 들어간 발목은 도자기를 빚어놓은 듯하다. 표지로 쓸 사진이라며 아내에게 촬영을 맡겼더니 영 시원치 않다. 분명 질투에 눈이 먼 그녀가 아름다움을 올곧게 담아내지 못한 탓이리라.


 지난 가을쯤 해서 레깅스를 입기 시작했다. 아내가 운동복을 주문하면서 내가 입을 레깅스도 끼워 넣어 주문했는데 처음엔 손사래를 쳤다. 남자가, 창피하게, 가오가 있지, 안 입을 핑계를 이래저래 만들었으나 막상 택배가 오니 호기심이 동했다. 한 번만 입어볼까. 한쪽씩 발을 집어넣은 뒤, TV에서 본 여자들이 붙는 청바지를 입는 양으로 겅중겅중 뛰어 레깅스를 골반까지 끌어올렸다. 중간중간 다리 근육의 골에 부딪는 바람에 당겨 올리지 못한 주름들을 집어 매끈하게 모양을 잡았다. 착장이 완료되자 당장에 드는 생각은, 와 내가 왜 이걸 여태 몰랐지. 였다.

 타이트하게 근육을 잡아주는 레깅스는 그 자체만으로 운동 수행 능력이 상승하는(듯한) 효과를 준다. 바벨을 집어 데드리프트라도 할라치면 늘 다리 앞쪽을 까서 상처가 생겼는데 레깅스를 입으면 그럴 염려도 없다. 달리기 할 때 흔들려서 거치적거리는 놈도 잡아준다. 무엇보다도 예쁘다. 맨다리도 예쁜데 레깅스를 입혀놓은 다리는 훨씬 예쁘다. 화장을 하고 안 하고의 차이만큼이다. 금요일 밤거리를 노니는 얼굴과 숙취에 시달리는 이튿날 아침의 얼굴 차이만큼이다. 쫀쫀하게 두 다리를 끌어안는 레깅스는 그야말로 마법이다. 마법처럼 다리에 아름다움을 더한다.


 공연과 영상을 전공했던 대학시절을 거치며 재밌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졸업하고 미국 어느 주에서 대마농사를 짓던 형은 돌연 노숙자쉼터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고, 옛날 미인도에서 본 듯한 쪽 째진 눈매가 매력적이었던 여자 후배는 어느 날 스페인에서 꽤 잘 나가는 유튜버로 활동하고 있었다. 지금 이야기하려는 형은 감성이 감성돔으로 살아날 만큼 인간미의 정수가 뚝뚝 듣는 따뜻한 글을 잘 썼다. 그리고 취미로 여장을 했다.

 형네 집에 술을 먹으러 가면 스탠드 옷걸이에 색색깔로 진열된 스타킹을 볼 수 있었다. 새침한 흰색 반스타킹도 있었고, 고급스런 쥐색 스타킹도 있었다. 빨간 스타킹은 옷걸이에 걸려있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야해서 숨이 턱 하고 막혔다. 거미줄처럼 얇은 인공섬유가 수만 개의 미세한 격자를 엮어 만들어낸 그것들은 손끝에 닿는 느낌만으로도 사람을 설레게 만들었다.

 형이 직접 스타킹을 신는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사진을 찍어둔 것은 볼 수 있었다. 사진에서 형의 다리는 색색의 스타킹을 신은 채로 요염하게 꼬고 있거나, 무릎과 무릎을 붙이고 양 발이 바깥으로 향하게 하거나, 발끝을 모은 발바닥을 환히 보이며 그 너머의 종아리며 허벅지가 얼핏 드러나게 했다.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말로 칭찬하진 못했지만 예쁘다는 느낌도 받았다.


 요샌 운동을 하러 가는 날이면 빨아서 잘 말려놓은 내 검정 레깅스부터 찾는다. 아내도 레깅스를 꼭 신는다. 검정 외에도 색이 다양해서 부럽다. 핑크도 있고, 코발트블루도 있다. 게다가 나처럼 레깅스 위에 반바지를 걸치지 않기 때문에 다리의 윤곽이 훨씬 잘 드러난다. 언젠가 오렌지며 아쿠아마린이며 핫핑크 레깅스를 반바지 없이 입을 날이 올까. 정말 다리 하나는 자신 있는데. 덩치 큰 남성용으로 누가 좀 만들어주면 좋겠다. 나도 예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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