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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Mar 30. 2023

26년 만에 전화한 친구는 무엇이 되었나

 채팅 알림이 익숙한 이름을 붙들고 말을 걸었다. 한참 생각하다가 설마 했다. 누구라고? 초등학교 때 형제처럼 붙어 다니던 셋 중 하나였다. 설익은 기억이 너무 강렬해서 지금도 이름이 잊히지 않을 만큼 친했다. 우스운 건, 졸업하고 어쩌다 소식을 듣는 것 외엔 한 번 마주한 일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후 스물여섯 해 동안 때가 많이 묻은 나는 의심부터 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 아예 그 친구가 아닌 사람이 말을 걸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요새는 피싱도 고도로 진화해서 언제 어떤 방법으로 사람의 빈틈을 찌르고 들어올지 알 수 없었다. 우선 태연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 지내지? 요샌 뭐 하고 있어? 묻자,

 초등학교 교사하다가 요샌 영화감독 하고 있어. 답이 돌아왔다. 정답이었다. 애들을 좋아하던 녀석은 아예 초등학교에서 먹고 살 작정을 했다. 하지만 영화감독을 한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내가 연극영화과를 나왔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그걸 빌미로 돈이라도 뜯어낼 심산일 수도 있었다. 두 번째 가능성이었다.

 갑자기 영화를 찍는다 그래, 결혼은 했지?

 그럼. O 년 전에 했어. 와이프 얼마 전에 임신했어. 역시 정답이었다. 녀석은 기혼자가 확실했다. 하지만 아내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굳이 가져다 붙이는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서른아홉에 첫 애가 생겼다는 게 의심스러웠다. 세 번째 가능성이 막 물꼬를 트려는 순간이었다. 메시지를 보내던 상대방이 전화를 했다. 목소리를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 친구였다. 우리 엄마와는 종종 전화통화로 안부를 물었단다. 나만 몰랐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친구는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한국예술종합학교 대학원에 들어갔다. 2015년도인가 시작했다고 하니 영화를 찍기 시작한 지는 8년 차가 되는 셈이었다. 다큐멘터리를 전공했다. 포털의 영화검색 사이트에서 친구의 이름을 검색했다. 화면에 104분짜리 장편 다큐를 감독한 이력과 함께 친구의 얼굴이 나타났다. 늙었지만 늙지 않은 모습 그대로였다. 성이 고씨인 데다 유인원 상이었던 친구는 별명이 고릴라였다. 늙은 고릴라가 매서운 감독의 눈을 하고 컴퓨터 화면 너머의 내 얼굴을 노려보고 있었다. 반가우면서도 짠했다.


 얼핏 소식이 궁금해서 전화한 것 같았지만 소방서에서 일하고부터 생긴 촉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너 많이 힘들구나. 묻자,

 어, 좀 여러모로 그래. 대답이 돌아왔고,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사실 그랬다. 사람은 아주 좋은 소식이 있더라도 굳이 20년도 넘게 연락 없던 친구에게 민망하게 전화를 걸지 않는다. 내가 알기론 그런 경우는 단 두 가지다. 살기 힘들거나, 보이스피싱이거나. 피싱은 아닌 것이 확실해졌으니 남은 것은 이 친구가 심적으로 힘겹고 불안한 상태라는 의미였다.

 쉬울 리가 없다. 극영화도 아니고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메이저 방송사 소속이 아닌 이상 영세할 수밖에 없다. 정해진 컷을 촬영하는 극영화와는 달리 다큐멘터리는 촬영을 하면서 내러티브가 드러나고 확장되기도 한다. 친구의 다큐멘터리는 다 쓰러져가는 시골학교의 아이들을 담았다고 하는데, 보나 마나 카메라 하나 둘러메고 학교를 떠나지 못하는 거지꼴의 유령이 되어 작업을 했을 것이다. 우스운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이 나서 찍었으리란 거다. 먹는 것도 잊고 촬영을 하다가 침대 위에 쓰러져서 작은 카메라에 담긴 흡족한 영상을 재생하고, 되감기 하고, 재생하고, 되감기 하며 밤을 지샜을 게 분명하다. 그건 그런 일이니까.

 너네 안사람은 부처 아니면 예수겠구나.

 그렇지.

 잘해줘. 알아서 잘하겠지만.

 그래야지.

 애기 나오면 그때부터 진짜다? 라떼는 말이야, 하며 혼자 떠들기 시작했다. 주저리주저리 던지는 말 중에 뭐 하나라도 걸려서 친구가 기운을 차렸으면 했다. 소방서에 와서 나를 주인공으로 다큐를 찍으면 대박을 칠 거라고 말했다. 네가 다큐 한다고 까부는 동안 나는 주방짬밥을 착실하게 쌓아 어지간한 음식점 못지않으니 와서 소주 한 잔 하라고도 했다. 남사스러워서 보고 싶단 말은 접었다. 어릴 때도 못했는데 지금도 용기가 나질 않았다. 전화가 끊어졌다.


 마음에 평화를 안기는 존재가 아내고, 그것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게 자식이고 가족이라면 예술은 그것과 정 반대 전선에 있는 무엇이다. 바람난 연인이고, 가출한 자식이다. 지성의 머리칼을 심는 대신 난데없이 바리캉을 들이미는 무식한 데모꾼이다. 그래서 난 자기 입으로 예술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싫다. 그들은 대개 진창을 네 발로 기며 개밥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내 친구는 예술한다고 으스대지 않았다. 대신 나에게 전화를 했다. 분명 죽어 자빠질 것 같은 심정으로. 그러니까 친구는 제대로 예술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26년 만에 전화한 친구는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었다. 거기에 앞서 어떤 여인의 남편이고, 곧 애아빠가 될 터였다. 친구의 예술이 그와 그의 가족을 헤치지 않기를 진심으로 기도했다. 나의 글도 그와 같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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